[농수축산신문=농수축산신문 ] 

 - 김기태 한국협동조합연구소장

전북의 어느 농협을 방문하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봤다.

농협이 있는 면소재지 가장 중심지 버스정류장 부근에 빈집과 상가가 즐비했다. 심지어 벽이 헐어 구멍이 숭숭 뚫린 집이 방치되고 있었고, 한 때 면에서 가장 부잣집이었을 법한 너른 집은 마당에 잡초만 무성하고 녹슨 대문은 역시 녹슨 자물쇠로 잠겨져 있었다. 우리의 농촌은 마을이 없어지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면이 통째로 없어질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닐까. 
 

지나가는 길에 거동 불편한 어르신의 목욕을 방문해서 해주는 차량을 만났다. 반가워 차량에 붙은 이름을 보니 시내에 있는 법인이었다. 목욕탕도 없는 면소재지에, 그나마 목욕서비스도 면 자체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없다. 분명 이 지역 젊은이들은 시내로 나가 일자리를 찾았으리라. 
 

대략 10년 정도 전에 우리는 벤처농기업 1000개가 성공해 각 1000명씩 고용하면 100만명의 농업인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벤처농업패러다임은 이번 정부에 들어와서도 스마트팜 정책이나 6차산업 등의 정책으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또한 50년 전부터 우리나라는 경영규모가 작아서 문제라며, 규모화된 전업농이 만들어지면 경쟁력이 확보될 것이라는 주문을 줄기차게 들어왔다. 농업인들의 자본만으로는 규모화가 어렵다며 거대자본의 농업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농업회사법인에 대한 혜택을 대거 늘렸다. 예를 들어 1000억원 자본금의 농업회사법인은 농민의 지분이 8억원, 0.8% 밖에 되지 않아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법과 제도를 고쳐줬다. 규모화 패러다임은 여전히 우리 농정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규모화된 전업농과 벤처농업 패러다임은 기본적으로 ‘농업발전 패러다임’이다. 농업이 발전하고 농사를 통해 돈을 많이 벌면 농촌은 자연스럽게 잘 될 것이라는 수십 년 묵은 패러다임이 여전히 농업계와 농업정책 관계자들의 뇌리를 장악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서도 단순히 농업기술에 이걸 어떻게 접목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니 스마트팜이니 BT니 하는 말들만 주로 정책의 대상으로 자리잡는다. 
 

더 깊게 이야기한다면 이런 기술적, 비용지원 중심의 접근은 기본적으로 투입(Input) 위주의 정책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규모화와 벤처농업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책담당자들에게 정책이란 ‘돈을 주는 것’이며, 농업계의 주체들도 ‘이왕 하는 사업, 일단 보조부터 받고 보자’라는 198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투입농정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 아닐까?
 

투입농정에서 ‘포용’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받거나, 내가 못 받거나’의 양자택일 속에서 포용을 따질 겨를은 없어진다. 혁신도 설 자리를 잃는다. 처음에는 모범적인 사례가 정책지원을 받겠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나눠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수차례에 걸쳐 농업계 전체가 경험했다. 사업계획서만 적절히 만들어 내면 된다는 인식이 만연한 속에서 혁신은 단지 ‘단어’일 뿐이다. 
 

전자동으로 정보를 파악해 로봇이 농사를 짓는 수천평 유리온실의 옆에 구멍이 뚫린 상점, 허물어진 면소재지가 있는 세기말의 풍경을 우리 농촌에서 보고 싶지 않다면, 이번 정부에 혁신적 포용의 패러다임을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농수축산신문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