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누구를 위한 농약 포장지 변경인가? (상)탁상위 연구용역

삼·사중 라벨 될 수도…생산비 증가 우려
‘농약 포장지 표시기준 개선’ 연구용역
제조사 비용 200억원 이상 증가
이미 이중라벨 사용중
시뮬레이션조차 안해
오남용, PLS로 충분히 교육·숙지
이한태 기자l승인2019.08.1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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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수축산신문=이한태 기자]

최근 농촌진흥청에서 추진 중인 ‘농약(작물보호제) 포장지 표시기준 변경’과 관련해 업계의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가운데 농진청의 무리한 추진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농약 포장지 라벨을 개선해 고령의 농가도 성분과 올바른 사용법, 위험성 등을 충분히 숙지해 잘못된 보관이나 오남용 문제를 방비하겠다는 취지지만 제조사, 판매관리인, 농업인들의 부담만을 가중시킬 수 있어 단순히 국감 보고용 전시행정이라는 것이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상)탁상위 연구용역
-(하)오남용 근본대책 찾아야

이번 농약 포장지 변경은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농약병과 물병이 구분이 어렵다’는 지적이 발단이 됐다. 농약과 물 용기의 표기상태가 크게 다르지 않아 음독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에 농진청은 농약병 표시를 보다 구체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답했다.

이에 농진청은 최근 농약 포장지의 글자 크기를 키우고, 그림 문자를 포함시키는 등의 내용을 담은 표시기준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농진청은 5000만원을 들여 지난 4월 아주대에 ‘농약 포장지 표시기준 개선’을 위한 연구용역을 맡겼다. 지난 7월에는 이에 대한 최종보고회를 가졌지만 그 내용이 농업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 글자 크기 키우고, 위치는 획일적으로

지난달 10일 발표된 농약 포장지 표시기준 개선 연구보고서에서는 농약의 잘못된 사용과 보관으로 인명피해, 조류집단 폐사 등이 발생하고 있으며 농촌 노인의 압도적 비문해 비율, 노안, 안전 불감증 등이 농약 오남용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특히 농약 포장지는 색상이 화려하고, 좁은 공간에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며, 정보가 임의 배치돼 있는 등 표준화가 이뤄지지 못 했다고도 지적했다. 또한 작은 글씨 크기로 위험 정보 전달이 부족하며 정보의 배치가 복잡하고, 용어가 난해하며 사용자에게 어려운 용어가 쓰였다고 덧붙였다.

이에 활자 크기를 크게 하고, 그림문자를 포함하며 표기 위치를 통일하는 등의 구체적인 규정 마련이 필요하다며 1000㎖ 이상, 250~1000㎖, 250㎖ 미만으로 용기를 구분해 용기 전면과 후면, 용기 마개 등에 표시해야 할 글자 크기와 표기 위치, 표시 내용 등을 소상히 제시했다.

# 시뮬레이션도 안 돌려 봐

이 같은 연구용역 보고서에 대해 업계에서는 거세게 반발했다. 가뜩이나 PLS(농약허용기준강화제도) 전면시행으로 라벨 등에 표기해야 할 사항이 늘어나 이중라벨로 사용되고 있었던 터라 ‘적을 내용이 늘어나는데 글자 크기는 더 커져야 한다’는 게 비상식적이란 것이다. 실제로 PLS 전면시행 이후 제조사들은 라벨을 변경하면서 각 사별로 수억원의 비용이 발생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또다시 글자 크기를 크게 해서 포장지를 변경한다면 이중라벨이 삼중, 사중이 될 수 있다. 연구용역 최종보고에서는 한국작물보호협회 정회원사 기준 90억원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 발표됐지만 제조사들은 전체 농약으로 확대할 경우 200억원 이상이 추가적으로 투입돼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추산액에 차이가 큰 이유에 대해 제조사들은 용역을 진행하면서 시뮬레이션조차 해보지 않은 결과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이러한 비용은 디자인 변경과 같은 1회성 비용이 아니라 매년 투입돼야 하는 비용이어서 고정 생산비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농약 포장지 변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시뮬레이션조차 돌려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업체별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결과를 알려달라고 하더니 이조차도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 농업 몰라도 너무 몰라

농약과 농업에 대한 몰이해도 지적된다. 당초 포장지 변경은 농약과 물의 용기의 구분이 어렵다는 점에서 출발했지만 농약 오남용 방지로 확대됐다. 농업인들이 농약 용기와 물 용기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구용역보고서에서도 농업인들은 ‘이미 농약인 것을 알고 있으므로 농약 글씨 강조는 상관없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남용 문제는 PLS를 통해 충분히 교육·숙지되고 있는 부분이다. 음독 문제 역시 오남용 문제와 마찬가지로 제품보다는 사용자의 주의가 요하는 부분이라는 인식이 보다 지배적이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농약 음독 문제는 농약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로 봐야 한다”며 “사람이 다리에서 뛰어내리면 다리를 없애고, 칼에 찔리면 칼을 없앨 것이냐”고 되물었다.

이어 그는 “농약 오남용 문제는 최근 PLS가 전면시행되면서 충분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며 “농약 오남용은 과거와 달리 농산물 출하를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농가에서도 주의를 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상표명 크기와 디자인은 회사의 유일한 홍보 수단이자 회사·제품 등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이를 획일화 시켜 농업인의 선택권을 줄였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또한 3년 전에 농약 포장지 표시규정을 변경할 당시에는 오남용 방지를 위해 작물그림을 빼달라고 요청해놓고, 이번에는 다시 음료로 오인할 수 있으니 어느 작물에 쓰는지 알 수 있도록 그림을 넣으라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농업과 관련이 없는 행정학과에서 진행된 이번 연구용역은 말 그대로 농업에 대한 이해없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만들어졌을 뿐”이라며 “최근 농진청과 수차례의 협의를 통해 연구용역보고 내용보다 완화된 기준이 마련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한태 기자  lht0203@afl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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