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포기에 ‘농업은 죽었다’
공익형 직불제, 이미 추진중…개도국 지위와 무관

[농수축산신문=이한태 기자]

▲ 농업인단체장들은 지난 25일 WTO(세계무역기구) 개발도상국 지위 관련 논의가 열린 외교부 정문 앞에서 “WTO 개도국 지위 포기는 농업의 사망선고와 같다”며 상복을 입고 WTO 개도국 지위 유지를 촉구했다.

정부의 WTO(세계무역기구)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발표로 농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WTO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농업인들의 성토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피해에 대해 이렇다 할 대책도 제시하지 않은 가운데 정부가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가 관계부처합동 브리핑을 통해 공식적으로 개도국 지위 포기를 밝히기까지 허울뿐인 간담회로 농업인단체장들을 기만했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 일방적 통보 위한 간담회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5일 외교부 브리핑실에서 관계부처합동 브리핑을 통해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에 앞서 농림축산식품부를 비롯해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와 농업인단체와의 간담회 자리가 잇따라 있었다. ‘WTO 개도국 지위와 관련해 농업계의 의견을 듣고, 우려되는 피해에 대한 대책을 마련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취지였지만 농업인단체들의 요구가 실제로 반영된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이에 이러한 간담회 자체가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을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일부 농업인단체들은 간담회 자리를 보이콧하기도 했다.

김홍길 축산관련단체협의회장은 “대책 얘기를 하자고 불러놓고는 농업계 예산이 이미 충분하다는 취지의 말만 반복하는 등 의견수렴이나 대책마련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다”며 “간담회 자체가 일방적으로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을 하기 위한 정부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 WTO 개도국 특혜인가?

WTO 개도국 지위와 관련한 논의나 발표가 있는 자리에서 정부 관계자는 언제나 WTO 개도국 지위를 ‘특혜’라고 표현했다. 우리 농업 현실을 감안했을 때 ‘당연한 지위’라는 농업계의 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특혜라는 표현을 고집한 이유에 대해 ‘부당하게 누리고 있는 혜택’으로 인식돼 포기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꼼수가 아니었느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김옥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은 “우리 경제의 위상을 얘기하지만 1000만원 수준에 불과한 농업소득, 초고령화된 농업·농촌, 부족한 후계인력 등을 감안할 때 우리 농업·농촌을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당연한 지위를 특혜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겠다는 뜻 아니었겠느냐”고 따졌다.

# 말뿐인 대응방향

관계부처합동 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밝힌 대응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WTO 농업협상 등에서 쌀 등 국내 농업의 민감분야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것과 국내 농업에 영향이 발생할 경우 피해 보전대책을 마련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 농업의 근본적인 경쟁력 제고를 위한 대책을 지속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쌀 등 민감분야 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밝히지 않았으며 국내 농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등 선제적인 노력을 하겠다는 말과는 반대로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를 위해 추진하는 농업인 소득안정과 경영안정 지원, 국내 농산물 수급조절 기능 강화 등 농업 경쟁력 강화 정책은 이미 실시되고 있거나 실시 계획이 마련된 부분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게 농업계의 입장이다.

임영호 한국농축산연합회 회장은 “공익형 직불제로의 전환 등 정부가 대책이라고 내놓고 있는 것들이 이미 추진하기로 약속이 돼 있던 것들이거나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할 일들이 대부분이다”며 “원래 하기로 했던 것들을 놓고 WTO 개도국 지위 포기와 관련한 대책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 공익형 직불제 물타기

정부가 설명하는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이후의 농업 경쟁력 강화 정책이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는 예산 부분이다. 정부에서는 내년 농업예산을 최근 10년내 가장 높은 증가율 수준(4.4%)으로 확대해 15조3000억원을 편성했으며 지방이양 예산까지 합하면 부족하지 않다고 밝혔다. 특히 공익형 직불제 예산 2조2000억원을 토대로 허용보조로 전환하면 개도국 지위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농업계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농업 예산 증가율은 국가 전체 예산 증가율에 한참 미치지 못 하는 수준이며 공익형 직불제와 관련한 논의와 예산은 이미 농업의 공익적 기능과 관련해 국가적 공감대를 토대로 추진되고 있던 것으로 WTO 개도국 지위와 무관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고문삼 한국농업인단체연합 상임대표는 “농업의 공익적 기능과 관련해 추진 중인 공익형 직불제 관련 예산은 이미 정부와 국회에서 약속을 한 부분으로 현재 예산 확대를 위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중이다”며 “이러한 가운데 갑자기 공익형 직불제가 WTO 개도국 지위 포기에 따른 대책이라고 말하는 것을 농업계가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힐난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농수축산신문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