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계와 사전협의도 안해
'농업패싱‘ 심각
농민단체 실력행사 나서

[농수축산신문=이한태 기자]

농업계와 사전에 어떠한 협의도 이뤄지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이 지난 4일 사실상 타결되면서 농업계의 분노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정부가 WTO(세계무역기구)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밝힌 지 불과 10여일만에 전해진 소식이어서 농업계는 충격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국농업인단체연합은 지난 6일 성명서를 통해 “정부는 지난달 25일 WTO 농업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함으로써 250만 농업인을 분노하게 했다”며 “이어 RCEP까지 타결됨에 따라 농산물 시장 개방 가속화로 인한 농업피해가 자명해 농업계는 다시한번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농업계가 이처럼 거세게 반발하는 이유는 RCEP 타결로 국내 농업이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불 보듯 명확하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포스트-FTA 농업통상 현안 대응 방안’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우리나라의 RCEP 회원국에 대한 농산물 수입과 수출 규모는 각각 66억8000만달러와 31억5000만달러로 두 배 이상 차이를 보였다. 또한 2013년부터 2015년까지 평균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대 RCEP 회원국 수입액은 우리나라 전체 농산물 수입액의 39.1%를 차지할 만큼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심각한 무역 불균형을 나타냈다. RCEP 회원국에 중국을 비롯한 농업 강국이 포함돼 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성명을 통해 “아세안, 중국 등과는 비교적 낮은 수준으로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했기 때문에 RCEP 협상 수준에 따라 우리 농업에 미치는 영향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며 “WTO 농업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기로 한데 이어 또 다시 RCEP을 타결해 농업계는 농업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에 망연자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농연은 “국내 농산물 시장이 미국과 중국 간 힘겨루기의 희생양으로 전락할까 우려된다”며 “미국과 중국이 차지하는 국내 농축산물 비중이 큰 상황에서 개도국 지위상실과 RCEP 타결로 그 비중은 더 커질 수 있고, 추가 시장 개방의 빌미까지 제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지난해 기준 두 나라가 차지하는 국내 농축산물 수입 비중은 중량 기준으로 미국이 35%, 중국이 10%였고 총액 대비로는 미국 21%, 중국 10%였다.

이러한 농업계 피해가 자명한 가운데 국제 통상의 최대 이해당사자인 농업계와의 소통 부재도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김기형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은 “정부가 RCEP 타결을 발표하기까지 농업계와 어떠한 협의도 없었다”며 “WTO 개도국 지위 문제나 RCEP을 보면 정부가 농업을 얼마나 홀대하고 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고 성토했다.

실제로 농업계에서는 통상협상을 거치는 과정에서 최대 이해당사자인 농업계와 사전협의가 당연한 수순인데 이를 생략하는 모양새에 대해 ‘농업 패싱’이라는 비판이 이어져 나오고 있다.

이에 한국농축산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농업인단체들은 오는 13일 농업인 총궐기대회를 통해 정부의 외교·통상 정책을 규탄하고 농정 실패를 비판할 것을 경고했다. 농민의길 역시 지난 11일 청와대 분수대광장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정부의 통상 정책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 나갔다. 이와 함께 전농은 지역별로 트렉터 등 농기계 반납 퍼포먼스를 비롯한 강력한 규탄 움직임을 확산해 나가고 있다.

저작권자 © 농수축산신문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