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겸손과 온화한 인품으로 모두가 머리를 숙이게 한 작은 거인
- 애국심, 민족의식 강해...임학, 천직으로 선택
- 육종학 관련 학술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 봉사
현신규 박사는 외유내강의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항상 겸손하고 온화한 인품이었지만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만나는 사람마다 어느 결에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마력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역대 대통령이 현 박사를 신뢰하고 존경하여 수원 오목천동의 임목육종연구소를 한 번 이상 직접 방문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1973년 박 대통령은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하고 당시 경기도 지사였던 손수익 씨를 산림녹화의 행정 책임을 맡을 적임자로 지목하여 청장으로 임명한 뒤 “수원에 있는 현신규 박사를 먼저 찾아가서 좋은 이야기를 듣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손 청장은 그때 현 박사를 만나보고 나서 개인적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분의 인품에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앞의 책 제 2~3부 참조)
현 박사는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어린 시절부터 매우 강했습니다. 임학을 천직으로 선택하였을 때에도 조국의 산하를 푸르게 만들겠다는 애국심과 투철한 소명의식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과묵한 성품이었지만 산림녹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1973년 전국 시·도 지사와 시장, 군수를 모아놓고 치산녹화 계획에 대해 현 박사가 특강을 하였는데 온 몸을 떨면서 눈에는 이슬이 맺히면서 산림녹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현 박사는 학문의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벼슬이나 세속적 출세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미 군정청의 요청으로 임업시험장장 직을 맡았을 때 3개월 뒤에 학교로 복귀하였고 그 후에도 두 차례나 농림부 산림국장직을 제의 받았으나 연구만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회신하고 거절하였습니다. 1963년 초대 농촌진흥청장 정남규 박사가 농림부 차관으로 영전하면서 당시 유병현 농림부 장관이 거의 강요하다시피 그 후임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한사코 사양하다가 1주일에 4일간만 농진청에서 근무하고 나머지 2일은 학교 연구실에서 일한다는 조건을 달아서 겨우 수락했다고 합니다.
현 박사는 일생을 오로지 학문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임학이나 육종학 관련 학술단체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봉사하였습니다. 그분이 처음으로 관여한 학회는 1940년 임업시험장 시절 시험장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조선임학회’였는데 그분은 제 2부회의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54년에 ‘한국농학회’가 창립되자 임학도 이 학회 내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60년 ‘한국임학회’로 독립하면서 현 박사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분은 학회지를 창간하여 학회의 기틀을 세웠고 10년 이상 연임하다가 1971년에 후배이자 서울대 동료교수인 심종섭 박사에게 인계하였습니다. ‘한국육종학회’는 1969년에 설립되었는데 현 박사가 육종연구의 원로였으므로 초대 회장을 맡아 1979년까지 활동하였고 1969년 ‘한국 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의 부회장과 ‘한국농업과학협회’의 회장직도 역임하였습니다. 1954년에 창설된 대한민국 학술원에 초창기부터 회원으로, 1964년에는 자연과학 제 5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59년 제 4회 학술원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1977년에 32년 만에 서울대 농대 임학과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현 박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1만 4,373권의 장서를 모두 농대 도서관에 기증하였습니다. 농대 도서관측은 그분의 호를 따서 3층 별실에 ‘향산(香山) 문고’를 설치하였습니다. 퇴임 후 5년이 지난 1982년 3월에는 ‘수당과학상’을 받았고 4월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할 정도로 사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였습니다. 특히 아랫사람들의 잘못이 있을 때 면전에서 꾸짖거나 야단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온화한 성품처럼 인정이 많았고 제자나 직원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도와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분은 형식이나 체면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공사구별이 뚜렷한 생활 신조를 평생 실천하였고 근검절약과 청렴결백이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일생동안 변함없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고 가족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요 따뜻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분은 보통사람보다 체구가 작았지만 진정한 스승의 표상이자 실로 위대한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 다음은 ‘정문기’ 편이 연재됩니다.
- 기자명 농수축산신문
- 입력 2010.05.06 10:00
- 수정 2015.06.2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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