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라후프 줄다리기 오재미 넣기로 떠들썩한 강당, 전기밥솥 자전거에 냄비세트 등 기념품도 넉넉해 보이는 운동장에서는 남아있는 농촌의 생기를 본다. 그러나 정작 그곳을 조금 벗어난 충남 금산군 남일면 시골길 농촌현장, 잔뜩 구부리고 앉아 하염없이 담배를 뿜어대는 70대 한 촌로의 모습에서는 가을의 고즈넉한 정경 이상의 뭔가 쓸쓸하고 사그라져가는 아쉬운 농촌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다가온다.

이 촌로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농촌을 지키고 있을까. 그가 그리고 있는 오늘의 농심은 무엇일까. 가을 수확기에는 유난이‘농심’을 많이 들먹인다. 추곡가 농심, 배추 값 농심, 농심을 울린 어쩌구….

특히 정치권에서는 선심성 농심을 마구 외쳐댄다. 오직 자기만이 올곧은 농정을 펼치는 선봉장인양 말이다. 어떤 국회의원은 “농심이 다 죽어가는 판에 일요일이 어디 있느냐. 본(농림수산)위원회만이라도 일요일에도 회의를 계속하자”고 우기기도 했다.

농정, 농심 참 많이 듣고 써먹은 단어지만 정곡을 찔러 말하기는 녹록치 않다.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려도 농심은 온통 특정 면류회사의 제품 브랜드로 도배질 되어있다. 새삼 놀랍다. 어디 가서 진정한 농심을 찾아야 하는 건가.

지금 충남의 ‘삼농혁신’에 편승, 농심을 재정립하는 문제가 화두다. 어떤 교수는 실학자 정약용이 말한 편농, 후농, 이농의 3농을 들어 삼농혁신을 보완 설명키도 한다. 농민 농업 농촌의 3농은 알겠는데 그 바탕이 되는 농심은 뭐냐 하는 거다.

농심의 본질과 현상을 ‘농부의 마음’이라고 뭉뚱그려서 단정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나는 농심이란 농업을 영위하는 이들의 진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허위나 사(詐)자가 끼어 있다면 이건 단연코 농심은 못된다. 직접 영농하지도 않는 자들이 떠드는 것도 농심이 아니다. 선심성예산, 원산지둔갑, 섞은 고추가루, 용어 선점, 불량식품유통 이런 거 다 농심이 아니다.

왜 사농공상(士農工商)일까. 속임으로부터 멀어지는 순서이다. 선비는 청백리 지조와 절개를 제1의 덕목으로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농민이다. 그들의 마음이 뒤틀리면 나라가 망했다. 국운이 기울어 질 때는 분연이 일어나 봉기하고 나라를 구한 것도 그들이다. 시대상의 바로미터이자 민심 최후의 보루는 바로 농심이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자기만의 잇속을 쫓지 않으며 양심에 입각한 생활 이것이 농민의 마음 이다. 상대가 나를 좀 속이거나 얕잡아 봐도 즉시 까발려 성토하거나 시비를 가리지는 않고 어눌하고 바보처럼 보이되 알건 다 알며 모르는 척 넘어가는 관용과 후덕함이 있는 마음 이것이 농심이다.

그런데 요새는 그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곡학아세 시류에 편승 권력과 부를 탐닉하는 인간들도 많다. 툭하면 훼절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급하면 농심을 끌어댄다.
참농민의 뜻. 그들의 생각과 사유(思惟)가 아니면 엄격히 따져 농심이라 말 할 수 없다. 땅의 뜻은 어머니의 마음 땅의 속성과 일치한다. 땅은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잘 커나가게 힘을 북돋아 준다. 땅심, 즉 토력이다. 그 땅에서 자란 산물을 먹고자라 그 공동체의 생각을 같이 하는 것이 민족이다. 농심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김창동 대전충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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