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에세이] 백현주 - 볍씨 틔우던 꼬마가 어른이 되어
[농수축산신문=농수축산신문]
첫 농사를 지었던 때 나는 고작 열 두 살이었다. 나는 아파트촌(村)에서 태어난 도시민이었고 쌀이라곤 마트에서 포대에 담긴 제품으로만 접한 어린아이였다. 최소 쌀이 벼에서 난다는 정보만 아는 초등학생이 벼농사를 생각한 건 어느 날 어머니가 보여준 어떤 행동 때문이었다.
“엄마, 왜 내 화분에다가 볍씨를 버려?”
“아… 왠지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네 화분에 뿌리면 영양도 되고 좋잖아.”
방학이 시작할 무렵 학교에서 되가져 온 가랑코에 꽃줄기 밑으로 어머니가 볍씨를 뿌린 것이다. 이웃이 친척에게 받은 거라며 너무 많다고 나눠 준 볍씨였다. 어머니도 처음엔 영양분이 많은 거라며 일일이 까서 밥을 지을 때 넣었으나 곧 포기하셨다. 살림으로 바쁜 어머니가 볍씨를 까는 시간을 들이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래서 대충 손으로 한 번 비벼 잘 빠져나오는 건 밥에 넣고 아닌 것은 내 꽃 화분에 뿌린 것이었다.
볍씨를 화분에 뿌린 일에 어머니께선 큰 의미는 없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영양이 가득한 좋은 씨앗이라는 말에 어린 내가 괜히 혹해버렸다. 어쩌면 내가 쌀을 키워서 그걸로 밥을 해먹을 수 있을지 몰라! 라는 야망에 찬 꼬맹이는 바로 아파트 단지 앞으로 달려가 분리수거로 내놓은 음료수 PT병을 주워왔다. 그리고 화분에 뿌려진 볍씨를 주워 음료수 병에 심었다. 장장 몇 개월에 걸쳐 내가 벼농사를 하게 된 일의 시작이었다.
말이 농사였지, 갑작스레 떠올려 시작한 농사를 잘 해낼 리가 없었다. 아파트 화단 흙을 퍼서 병에 넣고 볍씨를 대강 심고 주기적으로 물을 주는 정도였다.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었지만 예상외로 볍씨가 좋은 품질이었는지 싹이 나기 시작하더니 가을 즈음엔 정말 낱알이 여문 벼가 되었다. 벼가 노랗게 익어서 기울기 시작했을 땐 수확 날짜를 가지고 고민했다. 지금 수확해도 괜찮을까, 아니 아니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하곤 했다. 즐거운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학교를 끝내고 쏜살같이 집으로 와 화분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평소처럼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벼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잘린 밑동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을 뿐인 게 아닌가! 당황한 나는 언제나 그랬듯 어머니부터 찾아갔다.
“엄마, 엄마! 내 벼가 사라졌어!”
“그거? 이제 다 익었는데 네가 놔두는 게 아깝더라. 그래서 엄마가 수확해서 너 먹는 밥에 넣어 줬다.”
짧은 즐거움이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나름의 보람을 잃어버린 내가 안쓰러웠는지 어머니가 밥을 퍼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자, 네가 기른 쌀을 넣어 지은 밥이다. 네 쌀은 엄마가 손으로 고른 거라 뭔지 보일거야. 찾아가면서 먹어 봐라.”
정말로 하얀 쌀밥 속에는 약간 설익은 빛이 나는 어설픈 쌀이 섞여 있었다. 그래도 내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내가 기른 5개의 벼에는 분명 엄청나게 많은 쌀알이 매달려 있었건만, 내 밥그릇 속 쌀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적었다. 그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볼멘소리로 어머니께 내 쌀을 누가 다 먹은 거냐고 물어보았더니, 어머니가 빵 터지셨다.
“고작 5개의 벼에서 뭘 얼마나 바라니. 한 주먹은커녕 손바닥에도 안 찬단다!”
몇 개월에 걸쳐 보살핀 대가가 고작 한 주먹도 안 된다니. 나는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면 내가 먹는 이 밥그릇 속 쌀은 몇 개의 벼에서 나온 거지? 쌀 한 가마니를 채우는 쌀은 얼마나 많은 벼가 들어간 거야? 버스를 타고 긴 여행을 갈 때 마주쳤던 수많은 황금빛 논밭이 수확하면 생각만큼 많은 쌀을 얻을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노력하면 반드시 빛을 본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걸 농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후 나에게 있어 농업은 ‘보람도 없는 고된 노동’이라는 이미지로 오랫동안 자리했다.
강산이 한 번 변한 대학생 시절에 나는 다시금 농업에 흥미를 가졌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시작된 귀농 생활에 환상을 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귀농에 관한 서적 몇 권만 봐도 영화가 준 환상을 깨기엔 충분했다. 여전히 농업은 고되고 힘든 작업이자 이익이 나지 않는 산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농업에 대한 흥미는 사그라 들지 않았다. 오히려 찾아보고 알아갈수록 불타올랐다. 기후환경 문제와 더불어 식량 안보에 관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국가의 식량 안보는 사업적 가치가 우선시 될 수 없는 한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논하는 중요 기준 척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식량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이 현저히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또한 국가 간 거래에 있어 곡물 사업을 가장 먼저 내주며 이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때 이 문제를 가지고 대학 내에서 토론해보고자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나와 같이 식량 안보 문제에 대해 깊이 공감해주기도 하였지만 한 편으로는 경제적인 산업 구조를 내세우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 때만 해도 강의실을 달궜던 열띤 주제는 그저 ‘토론하기 좋은 주제’ 정도로 치부되었다.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삶에 식의 위기를 겪을 날이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의 안일함이 기어코 위기로 돌아왔다.
우리는 최근 몇 년간 기후 환경 문제와 코로나로 인한 극심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은 뒤집혔고, 세계 곳곳에서 각종 환경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 중 가장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 사업은 단연 농업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세계 각국이 곡물 수출제한 조치와 이동 제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동남아에서 시작된 파동은 중국, 미국으로 번졌고 우리의 밥상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우리 집 생활비를 걷어 월세, 관리비, 식비 등 가족 경제 살림을 담당하고 있다. 물가 불안정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식탁에 올라오는 식품을 구매할 때도 다달이 달라지는 물가 상승 변화를 많이 반영한다. 농사의 풍년, 흉년의 영역에서 우리 집 식탁을 균형 있게 지키려는 노력은 요 몇 년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밥상에 흰쌀밥 하나만 달랑 올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대학 시절 토론했던 ‘농업 위기’를 몸소 현실에서 체험하고야 말았다. 그 때 나와 함께 토론하던 학생들도 나와 같이 밥상의 위기를 겪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도 나와 같이 인터넷 쇼핑 리스트를 몇 번이나 새로 고치며 더 저렴한 식품을 찾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위기에 대한 그럴듯한 문제 제기와 뚜렷한 해결책 없이 끝나던 학문적인 토론을 생각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현 실정의 농업에 공감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국가가 제대로 된 대책을 해주기만을 기다렸던 지난날과 달리, 이제는 국민으로서 나 스스로 국내의 농업을 생각해본다. 소비자로서, 경제 구성원으로서, 또 하나의 생산자로서 농업의 질적 향상과 농업인의 환경을 함께 고민해주지 않는다면 우리 농산물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될 것이라 생각이 미쳐서이다.
첫 농사를 시작해서, 청년 귀농을 꿈꿨고, 나의 밥상을 고민하며 국가의 앞날을 걱정할 만큼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이 지속가능한 농업을 지향하는 시대가 되었다. 농업은 매번 나에게 삶의 지표를 만들어주는 하나의 방향이자 이상이었다. 나의 현실이 아스팔트를 디디는 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정성과 노력으로 기른 푸르른 논밭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나는 요즘 장바구니를 들고 지역 사회가 운영하는 친환경 로컬푸드 매장에서 자주 장을 본다. 생산자와 더 가까이, 그들을 생각하는 소비자로 농부의 정성을 돌려주고픈 까닭이다. 나에게 있어 농업은 단순히 ‘식(食)’이 아니라 사회를 생각하는 또 다른 가치로 계속 성장해 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배운 가치의 희망을 미래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푸르른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