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축산신문-KMI 공동기획] 어촌여지도 ⑫ 바다 위의 이방인,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이세진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연구원 어촌 일손 채우던 ‘대체 인력’을 넘어 공존의 파트너로…어촌의 내일 함께할 때 외국인 선원의 빠른 증가에도 주민과 교류없이 합숙생활로 고립되는 외국인 선원 ‘낯선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상존 어촌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는 여전히 부족 지역사회에 완전 정착해 어촌주민될 수 있게 현장의 갈등관리와 사회통합프로그램 병행해야 바다 위에서 땀 흘리는 이방인 우리 밥상과 지역경제 떠받치는 소중한 밑거름 우리 마을의 당당한 이웃으로 손 내미는 것이 사라져가는 어촌 살리는 돌파구
[농수축산신문=김동호 기자]
새벽 어스름이 짙게 깔린 죽변항. 한때는 배마다 한국인 선원들로 가득 찼던 이 항구도 이제는 그 풍경이 바뀌었다. 줄어든 한국인 어업인을 대신해 낯선 언어를 쓰는 외국인 청년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어창에 얼음을 채우고 그물을 손질하는 이들의 모습은, 오늘날 어촌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됐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버린 어촌. 우리 어촌은 타국에서 온 청년들이 없으면 배를 띄우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머나먼 이국땅의 거친 파도와 싸우고 있는가? 우리는 그들을 잠시 머무는 인력으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함께 어촌의 미래를 만들어갈 이웃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을까?
# 빈 그물을 채우는 이방인의 손길, 어촌의 피할 수 없는 현실
통계는 감상보다 더 선명하게 현실을 보여준다. 2005년 22만여 명에 달했던 어가인구는 지난해 8만여 명으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 선원은 1602명에서 1만268명으로 늘어 우리 바다의 조업을 책임지고 있다. 이는 어업에서 외국인근로자는 더 이상 ‘대체 인력’이 아닌 한국 수산업을 지탱하는 ‘필수 인력’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어촌 사회에 녹아드는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낯선 환경에서 언어와 문화 장벽을 마주하며 작업 후에도 현지 주민과 교류하기보다는 합숙 생활로 고립된다. 이러한 사회적 고립과 열악한 처우는 때때로 갈등이나 사건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한때 죽변항에서는 숙소에서 말다툼을 벌이던 베트남 선원들이 흉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벌어져 결국 한 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그만큼 외국인 선원을 둘러싼 갈등관리가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좁은 공간에 여러 국적의 선원이 뒤섞여 지내는 상황에서 언어 소통이 어렵고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이러한 내부 갈등이 폭발할 위험도 상존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이다. 일부 어촌 주민들 사이에서는 외국인 선원들의 음주 문화나 위생 문제에 대한 우려로 지역 행사나 모임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보다는 숙소에 머무는 것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선주들은 외국인 선원들이 외부와 접촉하는 것보다 숙소에서 집단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더 관리하기 수월하다고 느낀다.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이 작은 오해를 키우고 이는 지역 공동체의 통합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가 어촌현장의 요구에 따라 외국인 선원 수급관련 정책에 힘쓰는 만큼 현지 공동체와 외국인 간의 융화 프로그램이나 캠페인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바닷일을 할 사람을 데려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데려온 사람들이 지역사회의 안정적인 구성원으로 지낼 수 있도록 돕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희미한 불빛, 공존을 향한 노력들
어촌 사회에서 외국인 선원들을 그저 남남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일화들도 있다. 지난봄 경북 영덕군의 한 해안마을에 대형 산불이 덮쳤을 때 함께 조업하던 외국인 선원이 지역의 영웅이 된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수기안토(31) 씨는 불길이 마을을 덮치자 잠 든 노인들의 집집마다 뛰어들어 “할매, 불 났어요!”를 외치며 깨웠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한 명씩 등에 업고 300m 떨어진 방파제까지 나르며 10여 명의 주민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수기안토 씨는 “이 동네 노인분들은 내 가족이나 다름없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며 지역공동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정부 차원의 긍정적 변화도 시작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지자체, 수협과 함께 외국인 어업근로자의 주거환경 개선과 복지 향상을 위해 현재 복지회관 9개소를 운영 중이며 향후 5개소를 추가로 건립할 계획이다.
새롭게 건립되는 복지회관은 기존보다 객실당 인원을 축소해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하고, 휴게실, 커뮤니티 공간 등 실질적인 생활 편의를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 또한 시설 관리 인력과 통역 인력 배치, 한국어 교육과 안전교육 운영, 상시 상담 체계 마련 등 외국인 선원의 정착과 안전한 근로를 지원하는 다양한 기능이 복합적으로 담길 예정이다.
# 아직은 부족한 준비
우리 어촌사회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외국인 근로자들의 유입이 중단되며 그들이 어촌사회를 지탱하는 주요한 인력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낯선 이방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상존한다. 저개발국 또는 개발도상국 출신의 근로자에 대한 시선은 선진국에서 한국사회로 이주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단순히 오랜 세월 단일민족 국가를 유지해 온 정서로 치부하기에는 작지 않은 차이다.
물론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도록 시설 확충과 근로감독 등에 나서고 있지만 이 역시 잠시 머무르는 사람을 ‘관리’하기 위한 측면일 뿐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을 어촌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민자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서도 인종 간의 갈등이 여전히 상존해 있고 적극적으로 이민정책을 추진해 온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존재한다. 즉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아 온 우리 사회에는 더 큰 숙제가 남겨져 있는 것이다.
# 어촌의 미래, ‘낯선 이방인’에서 ‘함께 할 이웃’으로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이들을 언제까지 ‘필요하지만 낯선 존재’로만 남겨둘 것인가?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는 지금 어촌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향후 우리 사회 전반이 맞이할 이민 시대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어촌의 사례는 이러한 전국적 논의를 앞서 겪고 있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어촌 사회에서 외국인 선원을 대하는 태도 역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단순히 일손 부족을 메우기 위한 도구로만 본다면 이들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떠나고 다른 인력으로 대체되는 소모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들을 지역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 여긴다면 어촌은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도 있다.
이미 한국에 장기간 거주하며 언어를 익히고 지역에 동화된 외국인 선원들도 적지 않다. 그들이 지역사회에 완전히 정착해 어촌을 떠받치는 주민이 될 수 있도록 현장에서의 갈등관리와 사회 통합 프로그램을 병행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예컨대 어촌계와 수협 차원에서 다문화 이해 교육이나 지역 환영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어 외국인과 주민 간 소통의 장을 만드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외국인 선원의 주거환경 개선과 복지 확충은 그들의 삶의 질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대한 안정감을 심어줄 것이다.
나아가 일정 기간 성실히 근무한 외국인 선원들에게는 장기 체류나 귀화의 길을 열어주는 방안도 검토해 볼만하다. 법무부가 수기안토 씨에게 장기거주 비자(F-2)를 부여한 사례처럼 지역사회에 기여도가 높은 이주 노동자에게 정주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공동체 통합에 긍정적 신호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변화다. 외국인 이주민을 영원히 이방인으로 둘 것인지 아니면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답을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바다 위에서 땀 흘리는 그 청년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한국에 온 사람이고, 그들이 흘린 땀은 이미 우리의 밥상과 지역경제를 떠받치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한국 어촌의 미래는 이들 없이 지속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의 시선을 바꿀 때가 아닐까. 그들이 더 이상 ‘바다 위의 이방인’이 아닌, 우리 마을의 당당한 이웃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인구절벽 시대, 사라져가는 어촌을 살리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지 모른다. 우리의 이웃이 된 그들과 함께 풍요롭고 활기찬 어촌의 내일을 만들어가길 기대한다. 그리고 언젠가 한국에서 선장으로 정착하고 싶다는 수기안토 씨의 꿈도 이뤄지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