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축산신문-KMI 공동기획] 어촌여지도 ⑮ 끊기지 않는 배, 이어지는 삶
섬 주민에게 여객선은 단순한 교통수단 아닌 일상과 생존의 끈 신안군 공영 여객선 제도는 생활권‧사회 안전망 보장하는 새로운 모델 배 끊길까 두려움 없이 병원‧장보기‧행정업무 가능 주민 우선권 보장…지방소멸 대응과 직결 사람이 있는 섬 지키는 일, 배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 정부, 주민 중심 최소한 지원‧대응방안 마련을
[농수축산신문=김동호 기자]
이른 아침, 병풍도 선착장은 고요 속에서도 분주하다. 잔잔한 물결 위로 부표가 살랑이고 장을 보고 돌아온 사람, 병원에 들렀던 주민, 육지에서 새벽 배로 어업 일을 하러 들어온 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모인다.
잠시 뒤 부두에 닿은 배가 문을 열자 섬과 육지를 잇는 하루가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병풍도 주민들에게 여객선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바다를 건너와야 비로소 생활이 이어지고 일상이 완성된다.
# 민간 여객선 시대, 삶의 연속성은 흔들렸다
신안군에는 1025개의 섬이 있으며 그중 80개가 유인도서다. 연륙되지 않은 섬은 57개에 달하며 이 섬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여객선이나 도선이다. 특히 신안군에서 가장 먼 섬인 가거도까지는 쾌속선으로도 시속 60km 기준 약 4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고립 속에서 군의 인구는 급격하게 줄었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1970년 16만3883명이었던 신안군의 인구는 2000년 5만3150명으로 줄었고 지난해에는 3만8173명까지 감소했다. 50여 년 사이에 인구의 77% 가량이 감소한 것이다. 인구의 구성비 역시 악화되고 있다. 2008년 4만5718명 중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1만2607명으로 27.58%를 차지했으나 지난해에는 군민 3만8173명 중 1만5292명(40.06%)이 고령인구였다. 이 때문에 유인도서의 상당수에서 비어가는 마을이 많아졌다. 17~18가구가 살던 마을이 3가구만 남는 섬도 있을 정도다.
이같은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여객선의 수요는 줄었고 여기에 유가상승까지 겹치면서 영세한 여객선사들은 적자를 이유로 운항을 줄이거나 일부 항로는 운항 자체가 중단될 상황에 놓였다.
박종원 신안교통재단 이사장은 “연륙되지 않은 57개 유인도서의 주민들에게 유일한 교통수단은 여객선 내지 도선”이라며 “하지만 인구감소 등으로 경영난이 심해진 선사들은 운항횟수를 줄이면서 섬 지역 주민들의 불편함이 커졌다”고 전했다.
# 공영제 도입, 삶의 안전망을 구축하다
전남 신안군은 전국 최초로 민간 여객선을 직접 인수해 운항하는 공영 여객선 제도를 도입했다. 단순한 교통 편의를 넘어서 섬 주민들의 생활 안전망을 확보하고 주민 생활권 중심으로 배편을 재편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날 찾은 병풍도는 주민등록 기준 약 306명, 180가구가 거주한다. 병풍도에는 보건진료소와 기초적인 서류 발급이 가능한 출장소가 있지만 인근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등 작은 섬들은 병원, 약국, 관공서가 없어 주민들이 병풍도로 오거나 육지로 나가야 건강 관리, 생필품 구매, 교육 등을 이어갈 수 있다.
과거 민간 운영 시에는 운임 부담과 불규칙한 배편 때문에 주민들의 육지 접근권과 생활 안정성이 크게 제한됐다. 주민들은 언제든 배가 끊길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공영제 도입 이후 배편은 안정화됐고 주민 생활권이 최우선으로 보장됐다. 응급·의료 접근성도 개선됐고 육지 이동이 안정되는 동시에 안전 규정도 강화됐다.
주민들은 이제 이전보다 훨씬 안심하고 필요한 일정을 계획할 수 있게 됐다.
# 주민 생활권과 공공교통의 의미
민간 중심 운영 구조에서는 수익성과 효율성이 우선시되면서 섬 주민들의 생활권은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신안군의 여객선 공영제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며 주민 삶을 최우선으로 하는 교통정책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재단은 현재 전체 직원과 선원, 매표원 등 117명을 투입해 여객선 11척, 화물선 2척, 도선 24척을 운영하며 연간 100억 원 가량의 군 재정을 투입한다. 최근 인수한 ‘천사 1·2·3호’는 수요가 많아 손익분기점을 유지하지만 전체적으로 연간 약 80억 원 적자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재단의 목표는 수익이 아닌 주민 생활권 보장이다.
주민들의 목소리에서도 공영제의 의미가 드러난다.
소악도에 거주하는 김현우 쉬랑께 대표는 “과거에 민간 선사에서 여객선을 운영할 때는 섬에 거주하는 주민이라고 해서 우선적으로 탑승할 수 없었고 탑승객이 적으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결항되거나 날씨가 좋지 않아도 탑승객이 많으면 운항되는 일이 흔했다”며 “여객선이 공영화되면서 주민들이 우선 탑승할 수 있게 됐으며 차량 예약이 많아도 관광객보다는 주민이 먼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육지로의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섬 주민들에게 여객선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과 삶을 이어주는 사회안전망인 것이다.
공영제 도입 이후 섬 주민들은 과거 하루 두 번 운항과 제한적 서비스로 인한 불편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정시성·안전성·주민 우선권·요금 절감 등 종합적 편익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경제적 편익은 약 665억 원으로 추산되며 이는 투자금 448억 원 대비 약 1.5배에 달한다.
특히 마지막 배를 증편함으로써 과거 오후 3~4시에 운항이 끊겨 병원 진료 등 필수 이동이 어려웠던 문제도 해결됐다. 주민 생활과 긴급 상황 모두에서 공영제의 의미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섬 주민들의 생활권은 육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병풍도나 소악도 등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인근 큰 섬인 지도로는 장을 보러 다니고 목포로는 병원 진료나 행정 업무 등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으러 나간다. 작은 섬을 넘어 인근 섬과 육지까지 이어지는 생활망 속에서 연결의 중심에는 언제나 배가 있다.
배는 섬과 섬, 섬과 육지를 오가며 주민들의 장바구니를 채우고 병원 길을 열어주며 하루를 이어주는 삶의 연속성 그 자체다. 배 운항이 늘고 안정화되면서 주민들의 생활은 끊김없이 안정된 리듬 속에서 이어진다. 이렇게 배는 주민 생활권과 지역 경제 활동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 사람이 있는 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여객선 공영제는 단순한 교통 정책을 넘어 섬 주민의 삶과 지역 공동체를 지키는 안전망이 됐다. 신안군은 공영제를 통해 주민들은 배를 타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 없이 병원 진료나 생필품 구매, 행정업무를 볼 수 있게 됐다.
주민들의 만족도와 재정투입 대비 편익은 높지만 신안군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신안군의 재정자립도는 전국 최하위권이다. 열악한 재정 여건은 신안군의 의지와 무관하게 공영 항로 확대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현행 제도하에서 국고로 지원이 가능한 항로는 낙도보조항로에 불과하기에 국고 지원은 제한적이다.
유인섬이 적거나 섬의 인구가 적은 지역은 해상교통에 대한 지자체의 정책적 관심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한계로 꼽힌다. 신안군은 섬으로만 이뤄진 지자체이기에 공영제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도 많고 지자체장의 의지 역시 강했다. 하지만 유인섬이 적거나 섬에 사는 주민이 적은 경우 섬 주민들이 공영제를 원하더라도 정책의 우선순위 측면에서는 그 중요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지자체에 따라서 섬 지역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교통‧생활지원의 편차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유인섬의 인구 감소와 무인섬으로의 전환이다. 섬 주민이 모두 떠나면 행정적으로 무인섬이 되고 교통·생활 지원은 사실상 중단된다. 이로 인해 국토 외곽의 어촌마을이 가졌던 공익적 기능은 사라지고 다시 사람이 거주하기 어려운 무인섬이 된다.
유인섬은 단순 방치가 아닌 주민 중심의 최소한 지원과 대응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섬 지역의 주민들이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삶의 질 개선 정책이나 생활서비스에 대한 접근권 보장, 보건‧의료 등 필수서비스 지원, 지역 산업과 연계한 재정적인 보조 등의 정책은 유인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된다.
신안군 사례는 이러한 고민의 해법을 보여준다. 주민 생활 중심 설계와 안정적 배편 운영, 운임 부담 완화, 안전 규정 준수 등은 단순 이동 편의 이상으로 섬 주민의 생존과 지역 공동체 유지, 지방소멸 대응과 직결된다.
결국 공영여객선은 ‘배가 끊기지 않는 한, 주민의 삶도 이어진다’는 원칙을 현실로 만든 사례다. 도서 지역 정책 설계에서 핵심은 명확하다. 주민이 존재하는 한 삶을 보장할 안전망을 유지할 것인가? 섬이 없어도, 인구가 적어도, 혹은 무인도로 전환되더라도 국가와 지자체는 단순 방치가 아닌 주민 중심의 최소한 지원과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병풍도의 공영여객선은 그 선택 앞에서 주민 삶을 지키는 마지막 끈이자 지방소멸 대응의 핵심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