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농기자재·스마트팜 분야 벤처기업 육성 전략

김진헌 한국농업기술진흥원 충청농식품벤처창업센터 센터장

2025-09-17     농수축산신문

[농수축산신문=농수축산신문]

농업에도 산업처럼 전환의 시기가 있다. 1960년대 통일벼 보급으로 식량자급을 실현했던 시기를 시작으로, 제조업 중심의 경제개발로 농업 비중이 급격히 줄었던 시기, 규모화와 기계화를 중심으로 농업을 구조적으로 개선해 나갔던 1990년대,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농업의 고도화가 시작된 시기까지, 한국 농업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다섯 번의 구조변화를 겪어왔다. 지금은 그 다섯 번째, 가장 기술 집약적이고 융합적인 전환기 한복판에 있다.

스마트팜, 자동화 온실, 드론, 사물인터넷(IoT) 센서, 인공지능 기반 환경 제어 시스템. 언젠가는 첨단 공장에나 어울렸던 기술들이 이제는 농업 현장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농업의 공간이 더는 전통적 농촌에 머무르지 않고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디지털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심에는 농산업 벤처기업들이 있다. 이들은 농업과 기술, 산업과 서비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농업의 미래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한국농업기술진흥원(농진원)이 육성 중인 벤처기업 366개 중 약 19%가 농기자재와 스마트팜 분야다. 단순한 농기계나 자재 생산을 넘어 데이터 기반 솔루션, 사용자 친화적 인터페이스, 기존 설비와 연동 가능한 플랫폼 등으로 기술력을 다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본격적인 시장 진입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 하나 있다. 바로 실증 기반의 부재다.

농기자재나 스마트팜 기술은 특성상 단순 설명이나 카탈로그만으로 성능을 입증하기 어렵다. 현장 실증을 통해 효과와 안정성을 검증하고, 이를 기반으로 신뢰할 수 있는 성능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벤처기업이 자체적으로 실증장을 마련하거나 데이터를 검증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실증이 되지 않으면 판로 확보도 어렵고 외부 투자나 정부 사업 참여 역시 제한된다. 결국 좋은 기술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고 사장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진원은 벤처기업, 지자체, 농업 유관기관 간의 협력을 통해 실증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예컨대 충청농식품벤처센터가 위치한 충청남도는 스마트팜 특화단지를 조성 중이다. 단순한 스마트온실 설치를 넘어, 공동물류센터와 교육·마케팅까지 연계된 종합 인프라 구축 사업이다. 농진원은 이 기반을 활용해 지역 벤처기업의 제품을 실제 현장에 적용·실증하고, 그 결과를 데이터로 확보해 기업이 기술을 보완하고 제품을 마케팅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이러한 실증 사업은 단순한 테스트 그 이상이다. 실증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술적 문제점은 유관기관과 공동 연구개발로 이어지고, 신뢰성 있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홍보와 판로 개척은 기업의 지속 성장으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실증 기술을 기반으로 한 구독형 서비스 모델, 대규모 농장과 소규모 농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맞춤형 제품 개발 등으로 사업모델을 고도화할 수 있다.

물론 고려할 점도 있다. 실증 제품이 일정 수준 이상의 시장성을 갖췄는지 확인하기 위한 사전 분석이 필요하며, 실증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전문 대행기관의 참여도 중요하다. 또한, 실증 현장 내 기존 농업인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보상체계 등도 사전에 마련돼야 한다.

기술은 필요조건일 뿐이다. 충분조건은 신뢰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그것이 실제 농업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지를 입증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렵다. 실증 기반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농업 벤처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확장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스마트농업이 일상화되는 시대,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입증할 무대다. 그 무대를 만들기 위한 협력이야말로 농업의 여섯 번째 구조변화를 성공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