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축산신문-KMI 공동기획] 어촌여지도 ⑲ 섬이 만든 복지, 섬이 지키는 삶 : 일본 오기지마에서 배우는 주민주도 돌봄

이세진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연구원 오기지마의 상부상조맵, 섬 전체가 하나의 돌봄장치가 되다 타카마츠시 사회복지협의회 서비스 제공 대신 촉진자 역할 주민 스스로 복지 생산하고 해결책 실행 남의 집 현관문 두드리는 일ㅇ이 자연스러운 관계망 정부 재정에 의존한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 비용‧사각지대 ‘한계’ K-어촌복지 ‘어복버스’, 서비스 공급 수단 아닌 커뮤니티 복지망으로 진화해야

2025-11-14     김동호 기자

[농수축산신문=김동호 기자]

오기지마의 주민주도 돌봄은 주민이 직접 돌봄서비스를 공급함으로써 복지의 사각지대 문제를 해소하고 복지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국내 어복버스 사업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에 시사점을 던진다.

 

이세진 연구원

세토내해(瀬戸内海)에 떠 있는 작은 섬 오기지마(男木島)는 일본 카가와현 타카마츠항에서 뱃길로 40분을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지난 9월 기준 오기지마의 인구는 단 143명에 불과하고 그 중 83명이 65세 이상 고령자다.

이처럼 고요한 섬의 풍경 뒤편에는 아슬아슬한 현실이 있다. 이 섬의 복지를 책임지는 타카마츠시 사회복지협의회가 진단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병원이나 교통 문제와 동일 선상에 놓인, 어쩌면 더 근본적인 위기였다. 바로 관계의 희석화(繋がりの希薄化)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 그리고 역설적으로 늘어난 새로운 이주민의 증가는 섬 공동체의 오랜 연결고리를 약화시키고 있었다. 몸이 아픈 것보다 무서운 것은 아파도 누구에게 말할 곳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기지마 주민들과 사협이 꺼내든 것은 최신식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부상조맵(支え合いマップ)이라 불리는 관계의 설계도였다.

 

# 오기지마 모델 : 주민이 주도하는 촘촘한 복지 시스템

오기지마의 어촌 복지 모델은 관(官)의 지원 위에 민(民)의 자치가 꽃피는 형태다. 타카마츠시 사회복지협의회는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대신 주민 스스로 복지를 생산하도록 돕는 촉진자(facilitator) 역할을 선택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동 지원이다. 섬 주민들의 가장 큰 고충 중 하나는 고령자들이 장을 보거나 진료소에 갈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협의회는 버스를 직접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오기지마 지역사회복지협의회’라는 주민 조직이 스스로 ‘실시 주체’가 돼 이동 지원 서비스를 직접 운영하도록 했다. 시 협의회(본회)의 역할은 이 주민 조직에 연간 30만 엔의 보조금을 지원하고 서비스 운영에 필요한 차량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결국 차가 필요한 주민이 누구인지 언제 운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아는 것은 공무원이 아니라 섬 주민 자신들이다. 시는 주민들이 스스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도록 도구만 제공한 셈이다.

관계의 희석화라는 핵심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도 같은 맥락이다. 사협은 주민들의 가벼운 모임 활동이 이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시작된 교류살롱(サロン支援)은 섬 주민 누구나 참여하는 열린 모임이다. 차를 마시고 반찬을 나누고 근황을 전하는 소박한 만남이지만 그 자체로 고립 위험을 감지하는 예민한 센서가 된다. 일정 주기로 모이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이가 생기면 이웃이 먼저 연락하고 필요하면 코디네이터가 직접 방문한다. 살롱 운영에는 최대 20만 엔의 보조금이 붙는다. 이처럼 사람 간 접촉을 촘촘히 복원하는 평범한 형식이 섬 복지의 ‘첫 번째 방어선’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이는 복지가 결과인 동시에 과정임을 보여준다. 주민들이 이동 지원 차량의 운행 스케줄을 짜고 살롱에서 어떤 차를 마실지 함께 논의하는 과정 그 자체가 관계 희석화를 막는 가장 강력한 복지 활동이 된다. 시에서 값비싼 버스를 보내 주민을 고객으로 만드는 대신, 주민들이 스스로 차를 빌려 운전하게 함으로써 서로를 동료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주민 자치는 지역복지네트워크회의를 통해 생활 지원 서비스라는 구체적인 결과물로 이어진다. 이 회의에서 주민들은 스스로 과제를 발굴하고 해결책을 실행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지도 위의 관계망’이라 할 수 있다. 남의 집 현관을 두드리는 일이 자연스러운 공동체성이 바로 ‘상부상조(支え合い) 맵’으로 시각화되는 것이다. 각 가구의 건강 상태, 도움 필요도, 연락 가능한 이웃이 지도에 표시되고 코디네이터는 이를 기준으로 방문 순서와 연계를 조율한다. 실제로 메기지마에서는 주 2회 식사 배달이, 오기지마에서는 이 상부상조 지도 제작이 우선 실행 사업으로 배치됐다. 섬 전체가 하나의 돌봄 장치로 묶이는 방식이다.

# K-어촌복지: ‘찾아가는 서비스’의 빠른 효능감

장면을 바꿔 한국의 어촌을 보자. 해양수산부가 주관하는 찾아가는 어복버스 사업이 대표적이다. 오기지마가 주민 자치를 택했다면, 한국은 찾아가는 공공서비스라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모델을 택했다. 비대면 섬닥터라 불리는 의료 서비스부터 이·미용, 목욕, 심지어 노무·세무 상담까지 도시와 농촌 주민들이 누리는 기본적인 서비스를 직접 제공한다.

수십 년간 감내해야 했던 시간과 비용을 국가가 즉각적으로 보상해주는 효능감에 주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전남 신안군의 고령 주민들은 머리를 하기 위해 목포까지 나가서 한 어르신은 머리를 하러 목포까지 이동해야만했다. 그나마도 날씨가 안좋을 경우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복버스를 통해 미용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다보니 이에 대한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실제 시범사업 결과, 비대면 서비스 만족도는 9.4점, 이·미용·목욕 서비스 만족도는 9.7점까지 치솟았다. 이 모델에서 주민은 복지의 대상이자 수혜자다.

높은 만족도에도 불구하고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정부의 재정을 활용해 공공기관 등 공적인 조직에 의해 공급되는 서비스의 지속가능성과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 역시 사각지대를 직접 발굴해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어복버스사업은 정부가 재원을 마련해 독점적인 서비스공급자의 지위에서 서비스를 공급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정부의 재정 여건에 따라 서비스의 품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복버스를 통해 제공하는 서비스의 만족도가 높다면 서비스 공급에 발생하는 ‘비용’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관 주도로 이뤄진 사업은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지만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주민들을 직접 찾아내지는 못한다. 어복버스 역시 특정 시설에 모여 서비스를 공급하는 형태이기에 서비스 수혜자를 직접 발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주민들이 직접 서비스 수혜자를 찾아내는 오기지마의 모델이 어복버스사업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 어복버스가 상부상조맵을 만날 때

우리나라의 ‘비대면 섬닥터’와 ‘찾아가는 어복버스’는 기초적인 의료·생활 서비스조차 제공받지 못하는 섬 지역 주민들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다. 이 즉각적인 만족과 효능감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 즉각적인 만족을 지속가능한 관계로 연결할 다음 단계가 필요하다. 어복버스가 단순한 서비스 공급 수단이 아니라 커뮤니티 복지망으로 진화해야 하는 이유다.

어복버스 팀에 커뮤니티 촉진자(facilitator) 1명을 포함시키는 상상을 해보자. 이 촉진자는 어르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기지마 지역의 사례처럼 상부상조지도 만들기를 시도할 수 있다. “진료가 끝난 어르신들 우리 마을에서 혼자 계신 분, 거동 불편한 분이 누군지 같이 이야기해볼까요? 다음 버스가 오기 전까지 우리가 서로 도울 수 있는 게 뭘까요?” 어복버스는 떠나지만 이 맵은 마을에 남는다. 한발 더 나아가, 다음 어복버스 방문 전까지 이 맵을 기반으로 주민들끼리 섬의 특성에 맞는 복지를 운영해볼 수 있도록 소정의 오기지마식 보조금을 지원하는 시범사업도 연계해볼 수 있다.

한국의 어복버스는 서비스의 속도와 효율성을 증명했다. 이제 여기에 일본 오기지마의 관계의 밀도와 주민 자치라는 철학을 더할 차례다. 찾아가는 서비스가 스스로 서는 공동체의 마중물이 될 때, 비로소 한국형 어촌 복지는 지속가능한 궤도에 오를 것이다. 버스가 떠난 뒤에도 섬에 따뜻한 관계가 남도록 하는 것. 그것이 어촌여지도가 그려야 할 다음 복지 지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