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무의 한국 농정 인물기행[2]우장춘, 종(種)의 합성, 세계 농생명과학의 선구 (3)
<3> ‘밟혀도 꽃피우는 길가의 민들레꽃’ 일생과 자유천(慈乳泉)
- 고난 겪으며 ''''조선인'''' 으로 키운 어머니 있었기에
- 모멸, 질시 참고 기다리는 지혜 신념 용기 배워
- 자유천은 그런 어머니 그리며 기념한 우물
우장춘 박사는 광무 2년(1898년) 4월 8일 자정에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吳) 시 부근의 어머니 주소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한말의 혁명가 ‘우범선’, 어머니는 이시카와 현 한약방 집의 둘째 딸 ‘사카이(酒井) 나카’였습니다. 아버지는 우 박사가 여섯 살이 채 되기 전에 조선인 자객의 손에 암살되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자식을 일본인으로 기르는 쉬운 길을 마다하고 ‘조센징의 자식’이라는 주변의 멸시와 차별과 고난을 모자가 함께 감수하면서 우 박사를 한국인으로 키웠습니다. 일생을 통한 어머니의 가르침이 바로 ‘밟혀도 꽃피우는 길가의 민들레꽃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밟혀도 꽃피우기’ 위해서는 ‘길가의 민들레꽃’처럼 모멸과 질시를 참고 기다리는 지혜뿐만 아니라 자기완성의 신념과 용기와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자기 방어의 능력과 기술이 없이는 살아남아 꽃을 피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아들을 그렇게 철저히 훈련시켰고 그분 자신도 끊임없는 자기수련을 통해 그렇게 살아남아 꽃을 피우는 방법을 스스로 몸에 배게 익힌 것입니다.
우 박사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람들은 그분의 인품을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표현합니다. ‘형식이나 격식을 차리지 않고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있되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한다고 해서 불손해지는 사람이 없는’ 그런 분이었다고 합니다. 아이건 어른이건 농민이건 학생이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고 처음 만나는 사람도 전혀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자기수련의 극치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동래에 있었던 당시의 원예시험장은 우 박사가 유명해지면서 ‘신기한 곳’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찾아오는 학생들이나 농민들에게 아무데서나 함께 어울려 자상한 이웃 아저씨나 할아버지처럼 대하였고 대통령이 방문해도 행동거지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업무에 방해되니 참관을 제한하는 것이 좋겠다는 직원들의 건의에 대해 그분은 단호히 “우리의 지식은 그대로 농민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관 제한은 천부당만부당하다”고 하면서 오히려 행정직원들로 하여금 안내요원 역할을 하도록 지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마츠시마 박사의 회고를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 “나는 이분만큼 오리지낼리티가 풍부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 ‘도대체 어떻게 독창적인 일을 계속해서 해낼 수가 있는가?’ 라고 물었더니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자 하고 자기 스스로 훈련하는 거야’라고 하였어요. 시험장에 처음 들어온 우리들에게 매일 시시한 일을 시킨다고 불평했다가 다짜고짜 ‘아무리 시시한 일을 시켜보아도 그것조차 만족하게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대단한 일을 해낼 수가 없는 거야’라고 머리에서 불이 날 정도로 야단을 맞았어요. 정말 훌륭한 선배였다고 생각하며 항상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 박사는 니이가타 현 나가오카 여자사범학교 출신의 와타나베 고하루(渡邊 小春)와 신부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4녀 2남의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귀국 시 오오무라 수용소 앞에서 헤어진 뒤 여러 가지 사정상 가족과 함께 생활하지 못하고 원예시험장 사택에서 혼자 기거하였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의 몸으로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아들을 세계적인 학자로 대성케 하여 남편의 나라로 돌려보낸 것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우 박사가 56세 되던 1953년 8월, 81세로 별세하였는데 당시 우 박사 부인의 편지에 의하면 “아들을 장하게 길러내어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였으니 이제는 지하에 가서 남편을 만나도 충분히 면목이 선다”라고 하면서 웃으며 운명하였다고 합니다.
우 박사는 이 편지를 보고 울었습니다. 시험장 강당에 고인의 위패를 모신 추도소를 마련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조의를 표하였고 조위금이 전국 각지에서 답지하였습니다. 그분은 “이 조위금은 내 어머니를 위해 주신 돈이므로 어머니 같으면 무엇을 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시험장 구내에 어머니를 기념하는 우물을 하나 팠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에 따라 그동안 식수도 없어 불편했던 시험장 구내 한 곳에 우물을 팠더니 깨끗한 물이 솟아올라 ‘어머니의 젖줄과 같은 샘’이라는 의미로 ‘자유천(慈乳泉)’이라고 명명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부산시가 자유천을 중심으로 로타리를 조성하고 우 박사의 동상과 함께 안내판을 세워 보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