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일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농업연구관

[농수축산신문=농수축산신문]

‘녹색’ 하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한자로 ‘녹(綠)’은 푸르다는 뜻이다. 푸른 들판과 숲, 나무와 잔디가 저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녹색은 휴식과 안정감을 주는 심리적인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심장박동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고 한다. 의사의 수술복에 녹색이 쓰이는 이유다. 또 녹색을 자주 보면 시각적 피로가 줄어들어 눈 건강에도 좋다. 인류에게 녹색은 생명의 색이며 자연을 상징하는 대표색이다. 
 

겨울을 지나 황량했던 들판을 가장 먼저 파릇파릇한 녹색으로 물들이는 작물이 바로 보리와 밀 같은 보리류이다. 보리류는 밤보다 낮이 길어지는 춘분이 지나면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삼월부터 짙푸른 녹색을 띠다가 이삭이 나오는 사월이면 옅은 녹색으로 오월엔 이삭이 차오르며 황금색으로 넘실대는 가을의 풍요로운 축제를 먼저 준비한다. 
 

1970년대에는 어디서든 쉽게 푸른 보리밭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여름에는 벼를, 겨울에는 보리나 밀을 짓는 이모작이 흔했다. 당시 70~80만 ha에 달했던 보리재배 면적은 이제 3만~4만 ha로 줄었지만 지금도 이른 봄이면 호남평야 같은 재배지에서 녹색 보리밭이 광활하게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보리의 위상은 예전만 못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밀가루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용도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밀을 수입해오고 있는데 빵용은 미국, 면용은 호주에서 주로 들여오고 사료용은 우크라이나가 주 수입처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밀을 비롯한 곡물 가격이 급격하게 오르고 있다. 곡물값 급등은 곧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며 수입의존도가 높은 나라를 위협하고 있다. 식량안보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식량안보(Food Security)의 사전적 의미는 ‘식량의 생산과 재고량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 국민의 식량을 위협하는 외부의 요인에서 국민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2021년 한국의 세계 식량안보 지수는 32위다. 지난 2017년보다 8계단이나 하락한 순위이다.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지난해 45.8%, 연간 소비되는 곡물의 자급도는 21.0%이다. 즉 국민이 소비하는 식량의 절반 이상을 사료와 가공용까지 포함하면 80% 정도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셈이다. 게다가 코로나19 장기화로 세계 각국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수출 장벽을 높이고 있다. 국가 간 곡물 거래가 점점 경색되는 추세다. 식량 보호주의 확산 등 외부 요인으로 수입 경로가 막힌다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의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상황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 우리의 식량안보 상황은 이미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다. 
 

이처럼 세계 곡물 시장이 불안정한 가운데, 식량주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경관 보전 직불제나 논 활용직불제 활성화 등 농업소득을 보전하려는 최근의 움직임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와 함께 전반적인 곡물 생산과 활용방안, 식량 자급의 마지노선 법제화에 대한 검토와 논의도 같이 이뤄져야 할 때다.
 

한편 국내 보리와 밀의 생산기반이 충분하다는 점은 다행이다. 벼, 콩, 옥수수 등 여름작물을 수확한 후에 가을에 씨를 뿌려 이듬해 봄 수확하는 이모작을 하면 부족한 곳간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철 보리, 밀 등 보리류 재배가 미치는 영향은 곡물자급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산화탄소 고정, 공기정화와 같은 간접적인 효과와 더불어 녹색공간 창출을 통한 국민 정서 함양 등 부가적인 가치도 기대할 수 있다. 

보리밭이 아름다운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먹을 것 그 이상을 선사해주는 보리밭이다. 초록 물결 가득한 벌판이 귀하게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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