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축산신문=농수축산신문]

 

물가가 심상치 않다.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며 대부분의 나라가 돈을 풀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공급망 교란까지 더해져 원자재부문의 공급부족에 의한 물가 상승 위협이 쉽게 누그러들지 않을 기세다. 한때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던 각국이 이제는 시중 통화를 걷어 들이고 금리 인상을 공개적으로 예고하는 등 인플레이션 관리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러던 차에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인플레이션의 핵심 요소인 에너지와 식량 부문의 가격 폭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곡물이 세계 곡물식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에 달한다. ‘세계의 밀밭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만은 아니다. 그 밀밭이 전쟁으로 폐허가 돼가고 있으니 곡물 가격 상승은 가파르게,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머지않아 세계 곳곳에서 터질 또 한 번의 재스민 혁명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현실화되자 우리 정부도 올해 국산 밀 비축 물량을 지난해 8400톤에 비해 67% 늘린 14000톤으로 계획하고 있다. 가뜩이나 낮은 곡물자급률을 생각하면 정부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정부가 농산물 비축물량 관리를 서두르는 이유는 농산물 시장이 수요와 공급의 가격탄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가격이 폭락한다고 농산물 소비를 확 늘리거나, 반대로 가격이 폭등한다고 해서 농산물 소비를 줄일 수 없다. 이런 특성 때문에 농업을 생명산업이라고 말하고 수급정책을 시장에만 맡겨두는 나라는 없다.

해방 이후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정이 일반 고시 1로 가장 먼저 내놓은 정책이 미곡의 자유시장건이다.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던 사회주의 세력에 맞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겠다는 정책이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쌀값이 폭등하고 품귀현상으로 이어져 굶주린 군중들이 관공서에 난입하는 등 각지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의욕에 비해 농산물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미군정의 실패 이후 주요 농산물 가격 정책은 단 한 번도 시장에 맡겨진 적이 없다.

문제는 정부의 농산물 시장 개입이 적정 생산비 보장을 통한 안정적인 공급에 기여하기 보다는 줄곧 가격 상승 억제에만 맞춰져 왔다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이중곡가제를 비롯해 공급 부족으로 인한 가격 상승 요인이 있을 때마다 수입물량을 시장에 방출했다. 마치 낮은 농산물 가격만이 지고지선의 가치인 것처럼 정책을 펴왔다.

지금 쌀값이 바닥을 모른 채 곤두박질치고 있다. 가격 하락의 근본 원인은 정부의 방관에 있다. 농산물 가격은 낮아야 한다는 관성적인 사고방식도 한몫하고 있다. 식량안보를 위협할 정도에 이른 지금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식량자급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농촌 소멸의 시작은 낮은 농업소득에서 출발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도 식량안보를 강화하는 정책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전히 쌀시장 격리에 관한 구체적이고 발 빠른 대응은 들리지 않고 있다. 쌀 문제를 농업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문제, 국가안보의 문제로 보는 관점 전환이 시급하다.

오늘 폭락하는 쌀값은 내일의 우리에게 치명적인 반격을 가할 것이다. 국민의 생명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멀리 내다보는 가격지지 정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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