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훈 농촌진흥청 디지털농업추진단장

[농수축산신문=농수축산신문]

기조연설은 미국의 정당 역사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대통령 후보를 뽑는 정당의 전국대회에서, 지명투표에 들어가기 전에 당의 원로가 임시위원장이 되어 당의 기본정책을 밝히는 연설을 키노트 스피치(keynote speech)라고 한다. 우리는 이를 기조연설로 번역해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전당대회·학회 등에서 정당의 간부나 학회의 중요 인물이 국가정책이나 학회의 기본방침을 밝히는 경우 흔히 기조연설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기조연설의 시작은 정당 연설이었지만, 지금은 대규모 전시회에서도 기조연설을 한다. 기조연설을 맡은 발표자는 전시의 기본 방향과 성격, 기본정신을 알리고, 현시대의 기술 흐름을 청중에게 설명하곤 한다. 그래서 기조연설은 전시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의 대표가 맡는 경우가 많다. 이번 세계가전전시회(CES2023)에서는 존 디어(John Deere)의 최고경영자가 기조연설을 맡았다. 존 디어는 미국에 있는 농기계 회사로, 2019년에 처음으로 세계가전전시회에 트랙터를 전시했으며, 2022년에 씨&스프레이(See & Spray)라는 기술로 최우수 혁신상을 받았다.

필자는 존 디어 최고경영자의 50분짜리 기조연설에서 연설의 정석을 봤다. 사회자의 소개로 연단에 나온 최고경영자 존 메이는 존 디어 회사의 역사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혁신에 대해 13분 동안 이야기했다. 연설 도중에 이야기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농민 5명의 인터뷰 2분 분량을 넣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부사장에게 넘겼다. 부사장은 존 디어의 혁신 기술을 12분 동안 설명하고, 중간에 농민 인터뷰를 3분가량 넣었다. 뒤이어 첨단기술책임자가 나와서 농약 살포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기술을 11분 동안 소개했고, 그 역시 농민 인터뷰도 1분 정도 넣었다. 네 번째로 기술경영자가 나와서 환경을 보호하는 미래 기술을 9분 정도 소개했다. 이렇게 45분이 흘러갔다. 기조연설을 마무리하기 위해 최고경영자가 다시 무대로 나왔고, 현장에서 기조연설을 듣고 있던, 인터뷰에 등장한 농민들을 소개하는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다. 마지막으로 존 디어 전시장 방문을 당부하면서 연설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박수를 받고 끝내는가 싶더니 마치 음악회에서 앙코르를 받는 주인공처럼 다시 등장해서 진정한 목적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기술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Real purpose, real technology, real impact)”라는 존 디어의 비전을 명토 박아 말하고 들어갔다.

필자가 존 디어 최고경영자의 기조연설에서 연설의 정석을 봤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연설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실제 기술을 사용하는 농민의 인터뷰를 넣었고, 그분들이 환경을 지키는 진정한 파수꾼임을 밝혀 그분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표했으며, 혼자 연설하지 않고 부사장-첨단기술책임자-기술경영자가 이야기하게 함으로써 전문성도 높였다. 여기에, 연사별 연설 시간까지 안배하며 최고경영자로서 갖춰야 할 책임감도 보여줬다.

이렇게 꼼꼼하게 준비한 존 디어 최고경영자의 기조연설은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테크산업을 바라보는 월스트리트의 변화된 시선을 보여줬다. 세계가전전시회의 기본 방향은 휴먼(Human)이고, 핵심 키워드는 환경보호와 탄소중립을 통한 지속가능성이라는 기술 흐름을 청중에게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존 디어 최고경영자 존 메이의 기조연설을 들으면서 스티브 잡스의 계속 갈망하고, 항상 겸손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을 떠올리는 건 필자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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