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1. 西安유적과 중국 고대의 농본사상
2. 2천3백년전 치수시설 都江堰
3. 長江三峽과 三峽댐
4. 中山陵과 孫文의 건국대강

유람선이 거조우 댐의 도크를 통과해서 이창 선착장에 내린 것이 새벽 6시였다. 중국 국가 통계국 정운양 처장의 소개로 기다리고 있던 후베이(湖北)성 통계국 소속 직원의 안내를 받아 급히 국수로 아침을 때우고 7시에 우한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5시간을 한번도 쉬지 않고 달려서 우한에 도착, 곧바로 공항으로 가서 간단한 점심 후 비행기로 난징(南京)으로 향했다. 우한과 난징에서도 통계국 소속의 직원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안내를 해주었고 CJ 난징 법인장 김용구 후배가 자동차와 함께 한국어를 잘 하는 한족 직원 설양춘 양을 안내로 붙여주어서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정 처장과 김 법인장, 그 외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삼국지 吳나라 수도 建業이 바로 南京
난징은 오랜 옛날 위에(越)나라 시절부터 발달한 인구 500만명의 쟝쑤(江蘇)성 성도이며 장강의 하류가 시작되는 상업과 교통의 요지로서 예로부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던 중국 6대 고도의 하나이다. 삼국지 시대의 우(吳)나라 수도 졘예(建業)가 바로 여기여서 쑨췐(孫權)과 류베이(劉備), 주커량(諸葛亮) 등이 연관된 사적이 여러 군데 있으며 그 후 둥친(東晋)과 6조의 도읍이었다. 탕(唐)대에는 진링(金陵)이라 불리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영원한 시선(詩仙) 리바이(李白)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시로 유명하나 정작 봉황대는 찾을 길이 없었다. 장강 최장의 다리 난징 따챠오(大橋)가 가장 잘 보인다고 알려진 곳으로 강남 4대 명루의 하나인 예쟝로우(閱江樓)가 그곳이 아닐까 짐작은 해보았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난쑹(南宋)시대를 거쳐 위안(元)나라 말에 밍(明)태조 주위안창(朱元璋)이 이곳 사자산에서 8만명의 군사로 40만명의 적을 대파한 후 발흥하여 명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어 난징을 수도로 정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인 밍샤오링(明孝陵)을 비롯해서 성벽과 종루, 그의 명에 의해 축조된 예쟝로우-최근에 복원됨-등 명나라 초기 유적들이 상당 수 남아 있다. 그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공녀 출신인 공비 소생으로 알려져 있는 3대 황제 영러띠(永樂帝)가 조카인 졘웬띠(建文帝)에게서 황위를 찬탈한 뒤 전략상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명대 유적이 그리 많지는 않고 쯔진샨(紫金山) 자락의 밍샤오링도 관광지로 그리 인기를 끌지 못하는데 비해 바로 근처에 있는 쑨웬의 무덤인 중샨링에는 중국인들의 인기를 반영하듯 그야말로 엄청나게 사람이 많았다.

# 孫文의 中山陵, 황제 무덤 칭호 ‘릉’ 붙어
1912년 중화민국을 건국하여 쑨웬이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했던 곳이 난징이었다. 그 후 위안스카이(元世凱)의 반동과 북벌 등 우여곡절 끝에 그가 통일 중국의 완성을 눈앞에 둔 채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암으로 서거하자 우선 시신을 비윈스(碧雲寺)에 모신 다음 일찍이 여기에 묻히고 싶다고 했던 뜻을 받들어 이곳 쯔진산록을 묘지로 정하고 능묘의 설계를 국내외에 현상 공모, ‘푸른 융단 위에 서 있는 자유의 종’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결정하였다. 1926년 그의 1주기에 착공, 3년간의 역사 끝에 1929년 6월 1일 베이징에서 운구하여 중국 국민당의 이름으로 장례를 거행하였다. 민중의 영웅인 선생의 무덤에 그의 호를 따긴 했지만 옛날 황제의 무덤인 ‘릉’의 칭호를 붙인 것이 조금 어색하면서도 중국 인민의 절대적인 존경을 뜻하는 듯해서 묘한 호감을 가지게 한다.

8만 평방m의 공원으로 조성된 릉에 들어서면 입구의 대문에 해당하는 패방(牌坊) 위에 그의 평생 신조인 ‘박애(博愛)’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을 상징하여 푸른 기와, 흰 돌로 된 능문(陵門)의 중앙에 그의 또 하나의 신조인 ‘천하위공(天下爲公)’이 그의 친필로 새겨져 있고, 392개의 돌계단 위에 있는 본 건물인 제당(祭堂) 입구 세 개의 문 위에는 그가 주창한 삼민주의의 ‘민생(民生)’, ‘민권(民權)’, ‘민족(民族)’이 전서체로 나란히 쓰여 있다. 제당 중앙에 그의 전신 좌상이 흰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뒤쪽에 그의 관이 안치된 묘실이 있는데 제당의 석상을 둘러싼 사방 벽에는 검은 대리석에 그의 유언인 ‘총리유촉(總理遺囑)’이 후한민(胡漢民)의 글씨로, 그의 필생의 저작인 ‘건국대강(建國大綱)’ 전문이 그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 孫文 필생의 저작 ‘建國大綱’
1924년에 쓰여 진 이 ‘건국대강’은 짧은 글이지만 삼민주의에 바탕을 두고 국민혁명과 건국의 순서 및 그 방략에 대해 함축적으로 기술한 것으로서 그의 사상과 생애를 총결하는 핵심적 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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