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외화획득·외교첨병 원양어업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과거 6.25 동란으로 인한 폐허를 딛고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경제발전을 이뤄나가는데 초석을 놓는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그 시절 우리 원양어업은 주요 수출산업으로서 외화획득을 통해 경제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실례로 1958년 6만4000달러에 불과하던 우리나라 원양어업 수출액은 비약적으로 증가해 한때 우리나라 총수출액의 5%를 상회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 수산물 수출의 50%를 상회한 시절이 있을 정도로 경제 기여도가 높았다.

#외교첨병으로서의 민간외교 역할

원양어업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국을 누비며 외교첨병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민간외교를 통해 우리나라의 국제 외교 관계를 더욱 넓히고 정부의 외교력이 미치지 않는 연안국들과 국교를 수립하는데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다.

민간외교를 통해 우리나라의 국제 외교 관계를 더욱 넓히고 실질적으로 강화시키는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연안국과의 민간외교를 통해서는 우리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데도 일조해왔다.

#일자리 창출을 통한 고용안정 기여

원양어업은 일자리 창출을 통한 고용안정에도 기여했다.

일자리가 부족했던 당시 원양선원들은 외국에 나가 외화벌이를 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거액의 목돈을 쥘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이 일반화되면서 선망의 직업으로 각광받았다.

원양어선원은 1958년 17명으로 출발해 1972년에는 1만2230명으로 1만명을 돌파했고 1975년에는 2만3000명으로 최고치에 달했다.

현재도 수천명의 원양어선원들이 해외어장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수산물 가공과 유통종사자 등 관련 산업까지 포함하면 고용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국민의 활동시야를 해외로 확대

무엇보다 우리나라 원양어업은 국민들의 시야를 외국으로 돌리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활동영역을 세계로 확장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1957년 인도양 참치연승 조업으로 시작된 원양어업은 그 이후 세계 5대양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1958년 어선 1척, 해외기지 수 1개소에 불과하던 원양어업세력은 1977년 어선척수가 최고 850척까지 늘었으며 1990년 해외기지 수도 28개까지 증가했다.

원양어업은 해외투자 등을 통해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원양어업 최초의 해외투자는 제동산업(주)가 1970년 한국은행의 해외투자 허가를 받아 파나마 현지법인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그 이후 원양어업은 다양한 해외투자를 통해 해외진출을 모색해왔다.

해외이민사업도 활발했는데 1979년 아르헨티나 어업이민사업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국민의 활동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주요 수산식량 산업으로서의 역할

원양어업은 국민들에게 부족한 동물성 단백질을 공급하는데도 일조를 했다.

특히 먹을 것이 부족했던 1960년대와 70년대 원양수산물은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빈약한 국민식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왔다.

원양어업이 생산하는 참치, 명태, 오징어, 꽁치 등 어종은 국민들이 선호하는 대중성 어종이어서 수산 식량 산업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원양어업은 한편 통조림·어묵·맛살 등 연제품과 필렛 등 각종 가공품을 제조·공급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다양한 수산식품을 제공하고 있다.

#조선기술과 어업기술 한 차원 높여

원양어업은 조선기술과 어업기술도 한차원 끌어올렸다.

원양어선세력은 1958년 1척에 불과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1976년부터 시작된 계획조선사업 등으로 1977년에는 사상 최고치인 850척으로 늘어나는 등 세계 원양어업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였다.

원양어선 세력의 신장과 더불어 어선규모도 증가하면서 우리나라의 조선기술도 함께 발전해왔다.

또한 어군탐지기 등 각종 첨단 어로장비와 어법의 개발 등으로 인해 원양어로 기술의 발전도 이뤄졌다.
 

저작권자 © 농수축산신문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