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을 천원에 팝니다. 만원을 이만원에 삽니다.”
며칠 전 갈등관리와 상생을 주제로 하는 어느 세미나에서의 일이다.
발표자가 갑자기 만 원권 지폐 한 장을 꺼내 들더니 경매를 시작한다. 1000원부터 시작해서 1000원 단위로 호가하면 최고금액을 부른 사람에게 낙찰된단다. 단 차순위 가격에서 멈춘 사람은 그 금액을 지불하기로 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는 금지되는 조건이다. 1000원 내고 만원을 살 수도 있다. 처음 시작이 좋다. 1000원! 2000원! 3000원! 어느덧 9000원까지 간다. 여기서 멈추면 9000원 내고 만원을 받아 1000원 이득이지만 8000원 부른 사람은 고스란히 8000원을 내야 한다. 드디어 만원!! 부르고 만다. 만원을 만원주고 사면 아무런 이득이 없어도 8000원 손해 볼 수는 없다.

이제 무한 질주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남아 게임을 계속한다. 이 게임에서 먼저 멈추는 사람은 손해가 막심하다. 물론 낙찰된 사람도 만원 이상을 내고 만원을 사서 손해를 본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손해가 적어지려면 계속 호가를 높인다. 발표자가 웃으며 게임을 멈춘다. 1000원에 만원을 벌어볼 요량으로 시작된 게임 참가자 중 이득을 본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할 게임이었다.
필자는 새가슴에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마음은 있어도 게임을 참여하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6000원이 넘어가는 순간!! 아하!! 이제 발표자는 만원을 6000원에 팔아도 이득이 생기는구나!! 다들 멈출 수 없는 게임에 말려들어가는구나!! 갑작스런 제안에 재미있어하다가 게임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이미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시작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참여하지 않길 잘했다 안도한다. 새가슴...

우리 농업에도 이런 게임이 참 많다. 수입개방을 둘러싼 게임. 특히 FTA와 같은 양자협상의 결과 다음 상대국과의 동등조건 이상의 관세인하 게임. 대형유통업체 납품을 위한 할인 행사 게임. 지자체간의 수출보조금 지원 게임. 쌀 추가 수매 최저가 입찰 게임. 각 지역 브랜드별 과포장 게임. 앞으로 남고 뒤로 손해 보는 게임들이 참 많다. 아니 앞으로도 남지 않는 걸 깨닫고도 나부터 멈출 수 없어 계속되는 게임이다. 서로 파멸로 이르는 게임...

월드컵 32강 조 추첨에서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 잉글랜드가 한 조에 편성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죽음의 조다!! 이들 나라가 각각 다른 조라면 모두 4강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팀은 16강 탈락하고 짐을 싸야 한다. 처량하게 와일드카드 한 장을 받아도 최소 한 팀은 고향 앞으로다. 물론 16강 진출한 팀도 32강 리그전 세 경기에서 엄청난 전력 소모로 이후 경기에서 고전하게 된다. 그래서!! FIFA는 공평과 흥행을 위해 랭킹 등을 고려하여 실력별로 4개 그룹을 나눈다. 강팀끼리 32강에서 만나지 않게 한다. 무한경쟁, 운칠기삼을 일부 제한한다.

수백만 농민 출하주가 참여하는 도매시장의 게임은 과연 공정한가? 다수의 산지 주체를 줄 세우는 대형유통업체의 PB와 가격 할인 행사는 과연 공정한가? 브레이크 없는 파괴적 무한 경쟁을 제한할 수 있는가? 혹시 우리 사회는 파괴적 무한경쟁에 대한 제한을 규제완화 차원에서 금기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진국의 농업보조금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도매시장 거래제도 개선과 대형유통업체에 대한 규제가 이슈다. 바람직하다. 당연히 개선되어야 한다. 이는 규제가 아니라 공정성과 형평성의 확보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대안은 농민의 조직화를 통한 강한 브랜드 마케팅 주체의 형성이다. 제도는 최소한을 보장할 뿐이다. 마이너스섬에서 제로섬으로, 다시 플러스섬으로 나아가는 것은 농민과 함께하는 농업계 모두의 몫이다.

이제 브레이크를 걸고 좌우를 보자. 농민이 생산 잘 하면 그 다음부터는 농업계 모두의 몫이다. 농민보고 생산 잘하고, 조직화하고, 유통까지 잘하라하며 농업계는 뒷짐 지고 심판 역할해서는 안 된다. 같이 달려들어야 한다. 그게 갈등관리고 상생이다. 참 좋은 세미나였다.

<박영범 지역농업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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