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땅에 잘 자라는 나무를 만들어낸 한국인 최초의 임학박사
- 과기부 선정 우리나라 대표과학자 14인에 선정
- 이태리 포플러, 리기테다 소나무, 은수원 사시나무

현신규(玄 信圭) 박사는 최무선, 장영실, 허 준, 우장춘 등과 함께 2002년 과학기술부가 선정한 14명의 ‘우리나라 대표과학자’ 중 한 분입니다. 대한민국 건국 후의 인물로는 7명이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랐는데 그중 한 분이 평생을 바쳐 벌거벗은 조국의 강산을 푸르게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산림녹화의 학문적 기반 구축 및 실천자, 현신규’ 입니다. (이하 이경준 저 ‘산에 미래를 심다. 현신규 박사 이야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발행, 2006 참조)

현 박사의 업적 중에서 맨 먼저 손꼽히는 것이 바로 헐벗고 척박해진 이 땅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나무를 찾아내고 만들어낸 일입니다. 그분은 1950년대에 빨리 자라는 속성수의 대표 수종인 ‘이태리 포플러’를 도입, 전국에 보급하였고 1960년대 초에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곧게 빨리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한 ‘리기테다 소나무’를 만들어내어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한국산 포플러를 가지고 잡종 강세 현상을 최대한 이용하여 산지에도 조림이 가능한 획기적 신품종 ‘은수원사시나무’(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현 박사의 성을 따서 ‘현사시나무’로 명명)를 육종해 내어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현 박사는 1912년 1월 27일 평안남도 안주군의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한학자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만 5세 때 서당에 1년간 다니면서 한문을 먼저 배운 뒤 안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1924년 평소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큰 형의 추천으로 당시 서북지방의 민족사상 교육의 명문 오산중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뿐만 아니라 민족애에 일찍이 눈떴던 그분은 당시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었던 오산중학교 시절에 더욱 민족의식과 애국사상에 고취되었습니다. 그러나 2년 반이 지날 무렵 조만식 교장이 총독부 방침에 반대하여 학교를 떠나게 되자 더 이상 그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아서 자퇴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보 3학년 2학기에 편입하였습니다.

현 박사가 임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서 1930년 봄에 수원고농 임과에 입학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휘문고보를 졸업할 무렵까지 문학이나 철학을 전공할 생각을 가지고 큰 형처럼 일본에 유학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이 어렵게 되자 아버지가 아들이 졸업 후 관리로 취직하는 것이 생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입학한다는 수원고농 임과를 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한 일이 없었던 효자여서 자신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수원고농 임과에 입학하였습니다.

1906년에 설립된 수원고농은 총독부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 교육목표여서 졸업 후 좋은 직장이 보장되므로 일본인 사이에서도 입학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조선인 차별이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일제가 극소수의 조선인 학생을 입학시키게 되었는데 현 박사는 25명 정원의 임과 입학 동기생 중에서 단 두 명의 조선인 중 한 명이었고 농과에는 30명 중 5명만이 조선인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분으로서는 입학 당시 내심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것이 그분의 운명을 바꾸어 훗날 대한민국 산림녹화의 주역으로서 헐벗은 이 나라 이 강산을 푸르게 만드는 역사적 공헌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현 박사는 총독부 관리가 되기는 싫었기 때문에 수원고농에 다니면서도 장래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1년이 다 갈 즈음 우연히 기숙사 옆의 매점에 붙어있는 광고를 보고 당시 일본의 유명한 종교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 鑑三)의 ‘어떻게 나는 크리스천이 되었는가?’ 라는 책을 주문하여 매달 배달되는 전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 제 10권 ‘강연편’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고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은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마침내 방황을 마감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때부터 ‘임업은 나의 천직이요 임학이 나의 학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공부벌레가 되어 졸업 후 1933년 규슈제국대학에 진학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16년이 지난 1949년에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임학 박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앞의 책 제 1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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