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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산림생태 관한 최초 논문 일본 식품학회지에 발표
- ''''리기테다'''' 소나무 육종...전세계 ''''기적의 소나무'''' 개발 극찬

현신규 박사의 규슈제대 졸업논문은 햇빛을 많이 요구하는 소나무와 그늘에서 잘 자라는 편백을 비교한 ‘햇빛과 수분이 수목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학술지에 실리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졸업 후 취직한 임업시험장에서 처음 실시한 시험은 ‘소나무 천연갱신의 기초요건으로서 햇빛과 토양습도에 관한 시험’과 ‘주요 수종의 양분 섭취와 수분 흡수의 계절적 변화에 관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분은 1939년 8월 ‘백두산록 자원조사대’의 산림자원조사 책임자로 참가하여 나무의 나이테와 토양 부식층의 두께로 미루어 백두산의 마지막 폭발이 약 350년 전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해내었고 백두산의 산림 생태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일본식물학회지 제 57권 76호에 발표하였습니다.

현 박사는 규슈제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수목의 혈청학적 유연관계’를 연구 테마로 정하고 참나무와 밤나무, 집토끼를 재료로 사용하여 당시로서는 가장 첨단적인 시험을 계속하였습니다. 매일 이른 아침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연구실에 출근하여 밤늦게 다른 연구실의 불이 다 꺼질 때까지 홀로 남아서 연구에 몰두했는데 이러한 학구열은 이후 그분의 평생을 통해 시종여일하게 유지되었습니다. 1945년 4월 귀국 시 모든 물건은 그대로 두고 떠났지만 실험하던 자료만은 생명처럼 소중하게 배낭에 넣어 가져와서 나중에 서울대 교수 시절 바쁜 일정 중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밤늦도록 작업하여 논문을 완성하였습니다. 1947년 9월 그분은 이 논문을 맥아더 사령부를 통해 규슈대학의 은사 사토 게이지(佐藤 敬二) 교수에게 보냈는데 사토 교수가 직접 미비점을 보완하여 교수회의에 제출, 1949년 7월 25일 만장일치로 현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과시켰습니다. 논문의 제목은 ‘참나무속과 밤나무속 수목의 혈청학적 유연관계’였으며 당시 일본 언론은 ‘국경을 초월한 사제 간의 사랑’이라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1951년 미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소나무 육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캘리포니아의 ‘산림유전연구소’에서 ‘리기테다’소나무를 육종하였다는 것은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4배체(염색체가 두 배로 많은 변이체로 194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으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사용됨) 연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를 ‘임목 유전과 육종’이라는 독일의 권위 있는 학술지 제 1권 4호에 ‘콜키신(크로커스에서 추출한 약) 처리에 의한 소나무류의 배수체 유도’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여 국제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리기테다’소나무의 육종결과는 1956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린 제 12차 세계임업연구기관연합회(IUFRO) 총회에서 최초로 소개되었고 이후 59년 제 10차 세계육종학회 총회, 1960년 시애틀에서 열린 제 5차 세계임업대회, 1961년 하와이 제 11차 태평양 학술대회, 1969년 워싱턴 제 2차 세계임목육종협의회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소개되어 현 박사가 기립 박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소나무의 우수성은 미국에서도 증명되었고 캐나다, 독일,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호주, 일본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종자를 요청해서 보내주었습니다. 1962년 7월 미국 상원의 알렉산더 와일러 의원이 한국의 ‘기적의 소나무’를 극구 찬양하면서 “한국에 대한 우리의 원조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내준 꽃가루를 가지고 서울대학교의 현신규 박사가 기적의 소나무를 개발했다. 그 소나무가 우리에게 되 보내져 미국의 산림을 푸르게 하고 있다.”라고 발언하면서 우리에 대한 원조자금의 삭감을 저지한 바 있습니다. (앞의 책 153~6쪽)

‘현사시나무’에 대해서는 호주에서 적응시험을 한 결과 그 나라의 골치 덩이였던 ‘녹병균’에 대한 저항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결과를 1980년 IUFRO 총회와 국제포플러위원회에서 발표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국제학회에서 여러 차례 요직을 맡았습니다. 1964년 태평양 학술회의 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1966년 도쿄 태평양학술회의 임업분과 의장, 1969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제 8차 FAO 아·태지역 임업위원회 의장, 같은 해 아시아-대양주 육종학회 임목육종분과 의장 등으로 회의를 주재하였습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 2차 FAO 임목육종회의에서는 부의장에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1975년 로마 제 15차 국제포플러위원회에서는 부재중에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80년 터키 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재선되는 등 1987년에 타계할 때까지 30년이 넘도록 세계 임목육종학계를 선도한 거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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