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원예춘추’ 창간 등 신 농법을 지도 보급한 ‘흥농운동’ 주도
- ‘원예춘추’ 창간판로·품종특성·재배요령 소개
- ‘농업연구’ 월간지로 격상 농업 전반적 내용 다뤄
- 흥농에 ‘농민대학’ 개설…농업기술 지도·보급

이춘섭 회장이 1952년 흥농 창업 시부터 상보를 제작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한국종묘요람’이란 제호의 ‘창립기념 염매특집호’에는 총 59종의 채소 종자와 백일홍 등의 화초 종자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배추와 무를 안고 있는 한복 차림의 여인을 중심으로 양배추, 당근, 양파 등이 어우러진 원색 사진이 표지로 된 제 2호는 일본에서 인쇄를 해온 호화판 제본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보 제작에 당시 흥농의 자본금 1억 환의 절반이 넘는 6천만 원을 광고선전비로 투입하였습니다. 실로 그분의 시대를 앞선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1954년 여름 호에 그분의 의지가 담긴 글을 인용합니다. “해마다 수천만 원씩 일본 종자가 수입되고 있는 것은 국가적인 큰 손실일 뿐 아니라 농업국인 우리나라의 수치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농업과학 기술진의 총본산인 중앙농업기술원에서 우량품종의 원원종을 육성하고 천연적 망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고도(孤島)와 산간 계곡지대에서 채종한 제 1차 원종을 분양받아 폐사에서 생산한 종자는 다른 시판 종자와는 근본부터 판이하오니 안심하시고 이 우량종자를 재배하여 다수확을 거두시기를 감히 추장(推奬)합니다.” (앞의 책 75~85쪽 참조)

매년 두 권씩 발행한 이 상보는 1960년부터 1963년까지는 ‘원예춘추’, 1964년부터 1969년까지는 ‘농업연구’라는 월간 농업전문지로 격상되었습니다. 이 회장은 판로 개척과 품종의 특성 및 재배요령의 홍보를 위한 길잡이로서 그 이상 가는 매체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1960년 1월 ‘원예춘추’ 창간호, 그분의 창간사를 인용합니다. “금년이 월남하여 점포를 새로 연지 10년째요 불초 본인이 종묘계에 투족(投足)한 지 25년이 되는 해로서… 농업 원예계에 있어서 작금의 급격한 추이는 무엇보다도 이에 대처할 농민의식 계발과 실제적인 신 농법 지도 보급의 긴급성을 추구하고 있는바… 국·사립 농업원예시험장의 귀중한 연구 성과와 해외의 선진 농법을 도입 보급함과 아울러 독농가 제위의 숨어 있는 경험 등을 널리 캐내어 상호교류시킴으로써 흥농보국(興農報國)의 일익을 담당코자 ‘원예춘추’를 창간하게 되었는바… 가는 곳마다 흥농운동이 전개되어 농민 여러분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살기 좋은 농촌이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같은 책 104~6쪽)

이 회장은 처음부터 적자였던 이 잡지를 고집스럽게 계속 발행하였고 부수도 5만 부에서 10만 부, 15만 부로 늘리면서 우리 농민들이 손쉽게 구입해 볼 수 있도록 전국 도처에 지국을 설치했고 흥농 종자를 사가는 농민들에게는 무상으로 공급하였습니다. ‘농업연구’로 제호를 바꾼 1963년 10월호부터는 벼, 보리농사 등 농업 전반에 걸친 다양한 내용을 다루었고 지면도 64면에서 114면으로 대폭 증면하였습니다. 1970년 1월호부터는 ‘최신원예’로 제호를 다시 바꾸어 판형도 국판에서 4·6 배판으로 키웠고 이번에는 원예부문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원예전문지로 성격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같은 책 106~8쪽)

채소 신품종이 다투어 개발되면서 이들의 재배기술을 보급하는 일이 농촌지도의 주요과제가 되었으나 농촌진흥청의 지도 인력은 주곡 증산에만 매달려 채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여 신품종을 육성한 종묘회사의 육성담당자에게 위탁교육을 요청해 오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종묘회사 입장에서도 새로이 개발한 종자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재배기술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었습니다. 흥농은 1960년대 후반부터 육성담당자들이 주로 채소재배단지를 찾아다니며 간담회 형식의 사랑방 모임에서 영농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 회장의 주도로 1970년대에 들어서서 그 규모를 대폭 확대하였고 1973년부터는 ‘원예강습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강습회에 참여하는 농민은 많을 때는 1천여 명에 이르렀고 열의도 대단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1975년부터 흥농의 영업사원들에게 채소재배에 관한 이론과 실습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여 이들을 기술지도요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와서는 전국 도처에서 연간 수십 차례의 고추 품평회를 개최하였는데 강습회 못지않은 교육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1982년 8월 영양에서 열린 품평회에는 무려 1600여명의 농민과 관계공무원이 참석하였습니다. 1986년 창립 50주년을 맞아서는 영농기술지원단을 구성하여 현지 방문지도를 실시하여 효과를 본 다음 이를 매년 확대하였습니다. 1988년에는 흥농에 ‘농민대학’을 개설하여 1996년까지 약 5천 명의 수강생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최신 농업기술을 지도 보급하는 흥농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잘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같은 책 232~4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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