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원스럽고 화통한 성품의 가슴이 넓은 선비 체질 사업가
- 채소종자를 가득률 100%의 수출산업으로 육성
- 美·中에 농장 확보…현지 육종수출 전초기지화
-“내가 종묘업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천직”

이춘섭 회장은 시원스럽고 화통한 성품으로 배포가 큰 사람이었고 그래서인지 운도 따랐습니다. 초대 해남 채종관리소장 김원택 씨의 회고담입니다. “1954년 4월 흥농종묘 사장님이 크게 한턱을 내었는데 마시고 노는 동안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더군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그분의 인간미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사업가다운 배포가 신뢰감을 주었다고나 할까요.… 흥농은 정말 천운이 따르는 회사였어요. 최소한 발아만 해주어도 성공이다 싶었는데 50석 목표로 원종을 심으면 100석이 나오는 거야.” (앞의 책 87~8쪽) 또한 이 회장은 ‘석전경우(石田耕牛)라는 별명의 전형적 황해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이 직접 쓴 회고를 인용합니다. “씨를 뿌려야 거둘 수 있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린 적이 없는 사람은 마땅히 기대할 것도 없게 마련이다. 지난 80평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나름대로 줄곧 씨를 뿌리고 살아 왔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업계 학교를 다녔으며 종묘인으로서 농민과 더불어 씨를 뿌리는 평생을 살아 왔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같은 책 260~1쪽)

이 회장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사람을 끌리게 하였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온화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시골 노인같이 소탈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에는 참으로 집요하고 도전적인 추진력을 가졌으면서 자신이 이룩한 성과와 과실은 독점하지 않고 ‘나눔과 베풂’을 몸소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같은 책 309~11쪽, 고향 후배인 박종식 명동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의 회고 참조) 그분이 특히 열성을 다한 것은 우수한 종자를 국내에 보급하는데 그치지 않고 채소종자를 가득률 100%의 수출산업으로 키운 것입니다. 1980년대에 이미 미국에 해외 시험 기지를 개설하였고 미국과 중국에 4개의 농장을 확보, 현지 검정과 육종을 하여 수출 전초기지의 기반을 조성하였습니다. 1983년에 100만 불의 채소종자 수출 실적을 올렸고 1993년에 500만 불, 1997년에 1000만 불 수출탑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분은 1983년에 동탑산업훈장, 1994년에는 농업계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고 1996년에 고향사람들로부터 ‘황해도 영예도민상’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이 상을 ‘실향민들이 모여 고향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 그 어느 상보다도 각별하고 값지게 생각하였습니다. (같은 책 277~8쪽)

이 회장은 가슴이 넓으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은 선비 체질의 사업가였습니다. 그분의 회고를 다시 인용합니다. “나는 기업을 하면서 땅 투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우리 종묘업계의 체질상 그런 여건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육종농장과 거리가 멀거나 관계가 없는 땅은 거들떠 본 적이 없다.… 나는 흥농이 내 개인 소유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에 내 명의 모든 토지를 전부 회사 명의로 돌려놓았고 그 이후 내 명의로 한 평의 땅도 구입하지 않았다.” (같은 책 261~2쪽) 이 회장은 1989년 ‘윤곡장학재단’을 설립, 총 5억 원의 기금을 출연하여 1996년까지 모두 497명에게 농업계 대학과 대학원의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원하였고 1996년에는 ‘흥농 어린이 심장재단’을 설립, 10억 원을 출연하여 국내외 농촌 및 형편이 어려운 심장병 어린이 환자들을 지원하였습니다. (같은 책 279~83쪽)

이 회장은 타고난 건강 체질로 특별히 운동을 하거나 약을 먹지 않고서도 88세의 미수(米壽)를 누렸습니다. 그분은 씨앗외길 60년을 살아오면서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는 자연의 섭리를 통해 때가 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체득하였습니다. 그분의 회고를 또 한 번 인용합니다. “종묘업은 무한한 인내심을 요구하는 속성을 가진 특별한 사업이다. 나는 평생을 종묘업에 바쳤지만 농학박사도 아니고 직접 품종을 육성하는 육종가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종묘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에게 준 천직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나하나의 신품종이 육성되어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정말 가슴 속 싶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참지 못하였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종묘업계는 세계와 어깨를 겨눌 수 있을 만큼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보는데 나도 미력이지만 보탬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다는 자긍심도 함께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후에 다시 태어나도 씨를 뿌리는 종묘업 외길을 거듭 걸을 것이다.” (같은 책 266~7쪽) 그분의 씨앗외길 60년을 축약해 놓은 감동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다음은 ‘김삼만’ 편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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