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동공업’을 창업, 우리 농기계산업의 대표브랜드로 키우다
- 좁고 비옥하지 못한 땅 “기술에서 살길 찾아야”
- 인쇄소 견습공·철공소 취직…기술 익히기 전념
- 4형제 힘합쳐 농기계산업 대표 ‘대동공업’ 창업

김삼만(金三萬) 회장은 일생을 기계 기술자로 보낸 사람입니다. 그분의 자서전에서 인용합니다. “나는 가난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살길을 ‘기술’에서 찾았다. 그 뜻 하나를 앞세우고 내 딴에는 성실하게 40여년을 살아온 결과로 대동공업의 오늘이 나타났다. 물론 그것은 가족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좁고 비옥하지 못한 땅이고 가난하기에 우리는 기술을 익히고 기술을 살려야 한다.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기공일생, 김삼만 자서전’ 1976, 대동공업 발간, 137쪽) 그분의 일생을 일관한 신념을 잘 요약한 글입니다. 김 회장은 1972년 환갑을 맞이했을 때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써준 ‘기공일생(機工一生)’이란 휘호를 무엇보다도 감격해 했고 “내 일생은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같은 책 151쪽)

김 회장은 1912년 6월 19일 진주읍의 촉석루가 가까운 본성동에서 착실한 중농 집안의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김경서 씨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품으로 자수성가하였으나 김 회장이 진주 제일공립보통학교 4학년 열두 살 되던 해, 아버지가 금융조합이 반 강제로 지명한 이사가 되었을 때 돈에 쪼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빚보증을 섰다가 하루아침에 가산을 날리고 졸지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큰형은 남의 농사일을 하러 나섰고 작은 형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인쇄소에 견습공으로 취직, 어머니는 야채장수로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연명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김삼만 소년도 학업을 그만두고 날마다 산에 나무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그분은 이왕 학교를 못 다닐 바에야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고 1925년 13세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니시야’ 철공소에 들어가 4년을 ‘철공소가 학교’라고 생각하고 하루속히 기술을 배우려는 단 한 가지 목표로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같은 책 20~22쪽)

17세 되던 해 호기심에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고 쫓겨나자 겁이 나서 부모님 몰래 부산으로 무작정 가출하여 거기서도 철공소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3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기술을 익힌 김삼만 청년은 1929년 총독부 토목국 직영 공사장에 양수기 수리를 하러 갔다가 오오야마라는 일본인 현장 책임자의 눈에 들어 직속 공장에 특채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열심히 일했지만 나중에는 일본인들의 민족 차별에 화가 나서 그만 두고 1937년 오오야마 주임의 추천으로 김제군 월전광산의 기계기사로 전직하였습니다. 사장의 신임을 받으면서 4년간 일하다가 1941년 황해도 연백군의 광산 기계부 주임으로 옮겨서 다시 4년간 일하던 중 8·15 해방을 맞았습니다. (같은 책 1~3장 참조)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와서 철공소를 차리려다가 고향의 형제들이 힘을 합쳐 진주에 공장을 차리기로 합의, 4형제가 1947년 5월 20일 ‘대동공업사’를 창업하였습니다. 사원이 20명도 못 되는 작은 규모로 김삼만 사장, 동생들이 전무와 상무, 작은 형이 고문을 맡았습니다. 초기에는 자동차 정비, 정미소 발동기와 선박 엔진 수리, 기계 부속품 제작, 건축용 구조물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사장과 임원들이 작업복을 입고 직공들과 똑 같이 일했습니다. 1948년에 주물공장을 세워 수확용 송풍기와 발로 밟는 탈곡기, 정미소 원동기 등의 농기계를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성심을 다해 만든 제품이 인정을 받으면서 회사가 발전하여 6·25 직전에는 사원이 2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전쟁 중 인민군이 진주에 들어와서 온 가족이 고난을 겪고 공장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패물을 팔아 재건자금을 조달하는 등 전력을 다해 복구하였습니다. (대동공업 발간, ‘대동 50년사’ 1997, 177~91쪽 참조)

대동공업사가 농기구 제작 분야에서 자리를 잡게 된 1958년 유솜 부산사무소의 시바 씨가 공장을 방문했을 때 작업복을 입고 손에 기름을 묻힌 채 사원들과 꼭 같이 일하고 있는 김 회장을 보고 감명을 받아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원목과 석유, 휘발유 등을 특별히 배정해 주었고 공장 확장 자금으로 33만8000 달러의 ICA 차관을 받게 해준 것입니다. 1959년 이 자금으로 대단위 공장을 건립하면서 대동공업은 국내 굴지의 농기계회사로 도약하여 디젤발동기, 석유발동기, 동력탈곡기를 생산하다가 1963년에 마침내 경운기 제작에 착수하였습니다. 이 경운기는 1960~70년대 우리나라 농업기계화의 상징이 되었고 ‘대동공업’은 이후 트랙터, 이앙기, 콤바인 등을 제작 수출하는 한국 농기계 산업의 대표 브랜드로 성장한 것입니다. (같은 책 191~21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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