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경운기에서 트랙터로, 선진 농기계의 도입과 정착을 선도
- 1961년 유럽 시찰 중 기계화된 유럽 농업에 감동
- 농촌기계화 방안 첫 단계로 日 동력경운기 떠올려
- 미쓰비시와 기술제휴…경운기·트랙터 보급 앞장

대동공업의 본격적인 발전은 우리나라 농업기계화의 첨병인 경운기 제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961년 3월 김 회장은 서독의 기계공업회사 초청으로 3개월간 유럽 10개국을 시찰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때의 소감을 그분의 자서전에서 인용합니다. “기계공업의 수준을 높이고 정밀도를 더하는 데는 시설과 기술(사람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셈이다.…나는 듣던 이상으로 기계화된 유럽의 농업을 보고 무엇인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우리도 사람의 힘과 기껏 소의 힘을 빌리고 있는 고국의 농촌에 머지않아 기계를 들여놓아야겠다.…넓은 농토 위를 트랙터를 몰고 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만감이 오갔다.…트랙터, 콤바인 등은 무척 부러운 것이지만 경지정리가 안 되고 영세한 한국 농촌에서 당장 널리 쓸 형편은 못되었다. 내 머리 속에는 첫 단계의 농촌 기계화의 방안으로 그보다는 소형인 농기계로 일본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동력경운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앞의 책 ‘기공일생’ 88~97쪽 참조)

김 회장은 유럽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15일간 미쓰비시중공업, 구보다, 얀마 등 농기계공장과 농촌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일본은 2차 대전 후 미국의 가든용 트랙터를 개조해 소규모 영농에 알맞은 동력경운기를 개발하여 1950년대에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는데 1961년에 이미 1백만 대에 육박하여 농촌 근대화의 총아로 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경운기는 논밭을 갈고 흙을 부수면서 표면을 고르게 하는 것이 주 작업이지만 두둑 짓기나 중경제초, 양수작업도 하고 탈곡, 도정과정에서 원동기로 쓰일 뿐 아니라 트레일러를 붙여 농촌에서 긴요한 운반용 차량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본 현장을 살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먼저 얀마에 기술제휴를 요청하였는데 한·일간에 국교가 없어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분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미쓰비시에 경운기와 선박용 엔진의 제작을 위한 기술제휴를 요청하여 똑 같은 반응이 있자 “천하의 미쓰비시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안 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1~2년 안에 정상화될 것이 뻔한데 모든 것은 선견지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쓰비시 같은 대회사가 그런 반응을 보이다니 유감천만이다.”라고 일갈하였습니다. 그것이 통했던지 다음날 다시 만나 기술제휴에 관한 기본 합의를 얻어낸 뒤 귀국하였다고 합니다. (같은 책 100~1 쪽)

귀국해 보니 5·16 혁명정부가 들어서서 중농정책을 표방하면서 농업기계화의 정책의지도 천명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1년 반이 지난 1962년 11월 김 회장은 미쓰비시의 초청을 받고 다시 1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세부적인 문제까지 타협을 보아 12월 10일자로 ‘생산 첫 해에 국산화율 30%로 150대, 다음 해부터 매년 10%씩 국산화율을 높여나가기로 하고 생산량은 300대 이상’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국교 정상화 이전의 계약으로는 매우 의욕적이고 우호적인 것이었습니다. 1963년 1월 대동공업은 국내 최초로 H6E-CT83형 6마력짜리 석유용 경운기 생산에 착수하였습니다. 얼마 뒤 박정희 대통령(당시 최고회의 의장)이 진주에 온 길에 대동공업의 경운기 생산현장을 시찰, 격려해주었고, 그해 4월에는 국산품을 믿지 못하겠다고 일본의 완제품을 수입하려는 농림부의 방침에 반대한 김 회장의 직소를 박 대통령이 수용하여 ‘국산으로 보급하라’고 영단을 내려준 덕분에 우리 경운기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같은 책 101~10쪽)

경운기의 보급에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정부의 보조, 융자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66년까지 매년 몇 백대에 불과하던 경운기 보급대수가 1967년부터는 몇 천대 수준으로 올라서 1970년에 1만 대를 넘어섰고 1965년부터 8, 10마력짜리로 늘리면서 1968년에는 디젤경운기도 함께 생산 보급하였습니다. 국산화율도 1972년에 85%, 1980년에 100%로 1500개 부품 전량의 국산화를 완료하였습니다. 김 회장은 1965년에 이미 농기계의 대형화로 트랙터가 조만간 필요하리라고 생각하고 1967년부터 미국의 포드 회사와 트랙터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추진, 1969년 정식 계약을 체결하여 11월에 처음으로 47마력 트랙터 11대를 국산화율 20%로 생산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일본의 구보다와 기술제휴로 콤바인 제작에 착수하였고 김 회장이 별세한 1975년에는 트랙터 보급대수가 200대를 넘어섰습니다. (앞의 책 ‘대동 50년사’ 209~22쪽 참조) 그분이 선진 농기계를 도입, 우리 실정에 맞게 보급 정착시켜 한국 농업기계화의 선봉으로 평가 받는 큰 업적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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