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노력 없이 대가 없다’는 근면, 성실, 검약의 성공신화
- 작업복 차림에 30원짜리 두부백반 점심의 일상
- 노력 없는 대가 바라지 않으며 근면·성실 실천
- 사원들에게 권유…대동공업 사세 확장 밑거름

1958년에 김삼만 회장이 시바 씨를 만나 도움을 받은 일은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때 시바 씨는 그분의 학력이 초등학교 4학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미국의 포드 사장이나 에디슨도 학력은 없다시피 하다고 하면서 격려하였습니다. 시바 씨가 휘발유를 2천 드럼 쯤 사두라고 했을 때 그분은 기계나 고철이 있으면 불하해달라고 했습니다. 굳이 150 드럼을 배정해주어 받아두었더니 열흘이 지나자 값이 곱절로 뛰었습니다. 뒷날 주변 사람들이 ‘2천 드럼을 사놓았더라면’ 하고 아쉬워하자 그분은 “만약 그렇게 장사를 했더라면 대동공업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노력 없이 대가 없다’는 것이 그분의 평생 신조였던 것입니다. (앞의 책 ‘기공일생’ 81~2쪽)

5·16 후 농협중앙회장을 역임한 뒤 1963년 김 회장의 요청을 받고 대동공업 회장으로 초빙되어 1975년까지 함께 일한 오덕준 장군의 ‘회고기’에서 인용합니다. “김 사장의 검소한 생활태도나 절약하는 마음은 따를 사람이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대로 작업복 바지에다 잠바를 입기를 좋아했다.…회장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최고회의에 들어갔을 때 볼일을 마치고 나오는 나에게 옛 전우가 충고하였다. ‘저 양반 옷 좀 반듯하게 입게 하고 구두도 닦게 해요.’…그 무렵 점심때면 김 사장과 나는 30원짜리 두부찌개 백반을 날마다 먹었고 50원짜리 음식점에 들르기가 일쑤였다.…대동공업의 사세가 커진 것은 근본적으로 젊었을 때부터 아끼고 절약해온 김 사장의 검소한 생활과 절약하는 정신, 제품을 만드는 성실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같은 책 155~7쪽)

김 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대동공업에서 평생을 같이 지낸 만흥 씨의 회고입니다. “언젠가 형님은 사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미국이나 영국을 방문했을 때 회사마다 회의실에 태극기를 꽂고 나를 맞아주었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내가 이런 대접을 받다니! 나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형님은 몇 해 전 죽마고우인 김용주 부사장이 지어준 우송(愚松)이라는 호를 무척 좋아했다. 형님은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변해도 근면하고 성실하면 언제나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한 가지 일에 어리석을 정도로 정열을 바치고 바른 일에는 소나무처럼 꿋꿋한 형님에게 ‘어리석은 소나무’라는 호가 꼭 어울리는 것 같다.” (같은 책 160~5쪽)

아들인 김상수 회장의 발문에서 인용합니다. “선친은 외국 여행 때 선물 안 사오기로 유명했다. 부속품이나 쇳덩어리 등 기계 제작에 참고 될 물건들만 갖고 오셨다.…서울영업소에 사장 자리가 없어서 상무 책상 옆에 서서 업무보고를 받고 작업을 지시하셨다. 상무가 한번은 송구스런 생각으로 중고품 책상과 의자를 구입해서 사장 자리를 만들어 놓았더니 ‘사장 자리는 본사인 진주에 하나 있으면 되지 가는 곳마다 자리를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당장 물러오도록 하셨다는 것이다.…선친이 한국농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으로 계실 때 같이 일했던 정태훈 전무는 선친이 조합 일로 출장을 가도 사비를 썼지 한 번도 공금을 쓰는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 (같은 책 178~82쪽)

김 회장의 신념을 다시 한 번 자서전에서 인용합니다. “대동공업이 발전한 것은 나를 비롯한 우리 형제와 간부들이 모두 우수한 기술자이고 언제나 뛰어난 기능공들을 모으고 또 키울 수 있었다는데 원인이 있었다. ‘근면과 성실’을 생활신조로 삼고 실천해 왔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사원들의 성실하지 못한 사생활도 용서하지 않았다. 능력은 있으나 술을 좋아해서 가정생활에 책임을 느끼지 않고 월급날이면 집에 돈도 별로 갖고 가지 못하는 사원이 있을 경우 나는 월급을 부인에게 전하게도 해봤고 심한 경우에는 경고한 뒤에 해고한 일도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기술 하나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공·사 간에 성실과 검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내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내가 몸으로 체험하면서 얻은 신념이었다.” (같은 책 96~7쪽)

김 회장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로 혈육의 정조차 밖으로 나타낼 줄 모르는 분이었지만 마음속은 따뜻한 인간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갑자기 과로로 인한 간경화증으로 1975년 8월 9일에 만 63세로 별세한 뒤에 “유산 중 1억 원을 따로 떼어 방위성금에 3000만 원, 진주 지역 발전과 기계공업을 공부하는 종업원 자녀들의 학비로 7000만 원을 써 달라”는 유서가 공개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무처장관을 장례식에 보내어 금탑산업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분은 아쉽게 일찍 타계하였지만 지금도 근면, 성실, 검약의 ‘남강 성공신화’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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