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타고난 외교수완과 실력으로 우리 수산을 지키고 부흥시키다

지철근 선생은 키 180cm에 80kg의 거구에다 훤칠한 미남이었습니다. 홋카이도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교내 수영대회에서 배영, 평영 등 6~7개 종목에 걸쳐 우승을 휩쓸어 인기 스타가 되었고 일본씨름과 유도에도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운동부 주장 중에서는 유일한 조선인으로 정구부 주장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 덕에 차별을 별로 받지 않고 학창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에서는 특히 영어에 집중하여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다 온 실력파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밤을 새워가며 노력한 결과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러한 것들이 훗날 그분의 타고난 외교수완을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앞의 책 26~28쪽)

강원도 수산시험장 시절에는 3년간 꼬박 한 달 중 20여일 배를 타야 하는 해양관측 업무를 맡는 바람에 어로기술 습득은 물론 해양학과 어선, 어구 등에 관한 현장공부를 제대로 하면서 굴·돌김 양식과 조개 채취 및 증식, 대구·은어의 인공부화 시험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평안북도에서 정문기 선생과 1년 남짓 함께 근무하면서 수산물의 해상매매 금지와 만주국과의 사이에 압록강 뱅어 어업권 분쟁 업무에 특히 열정을 쏟아 국제 어업 분쟁 해결의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평화선 작업을 하면서 국제법을 공부, 당시 유진오(고려대 총장 역임) 박사가 주도하던 국제법학회에 가입하여 수산학도로서는 유일하게 이사로 선임되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책 37~39, 49쪽)

지 선생의 외교수완은 미군정의 원조자금을 수산 분야에 끌어오는 데서 빛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그분은 SCAP의 수산분야 실력자들과 친교를 맺어 평화선을 관철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고 UNKRA(유엔한국재건단)와 함께 한·미 수산협정을 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캐나다에서 UNKRA에 파견되어 온 폴슨(Paulson) 씨와 ‘한국농림수산 부흥계획’을 수립하면서 수산국의 의견을 거의 그대로 반영시켜 전후 수산 부흥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그 자금으로 수산복구에 필요한 자재 공급 외에 시범 통조림공장 2개소 설립과 유능한 수산분야 인재의 해외 연수를 실시하였습니다. USOM(미국대외원조기관) ‘합동경제위원회(OEB)’의 실세인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면서는 원(Won) 조정관과 협력하여 어선도입, 어항 수축 및 개축, 장비 개량과 어구 도입 수산분야에 더 많은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같은 책 48, 52~53, 56~57, 65~68쪽)

앞서 소개한 것처럼 귀중한 서해안 어장도를 일본인 홋카이도대학 후배로부터 입수한 것은 그분의 신의를 기초로 한 교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1951년 10월에 열린 한·일 예비회담과 1952년 2월의 제 1차 한·일 회담부터 1965년 6월 22일 한·일 어업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지 선생이 거의 수산분야의 당연직 대표처럼 참여하여 평화선을 획정·선포하고 수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그분의 외교수완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지 선생의 저서 ‘평화선(범우사 발간, 1979)’과 ‘한·일 어업분쟁사(한국수산신보사 발간, 1989)’에 유진오 박사와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이 쓴 서문을 각각 인용합니다. “1960년 제 5차 한·일 회담이 열려 내가 그 수석대표를 맡았을 때 어업, 수산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지철근 대표의 해박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수산입국의 비전과 지식, 경험은 일본인 사이에서 정평이 있었고 미국인 전문가 사이에도 널리 알려져 ‘수산한국’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내가 제 2차, 3차 한·일 회담의 수석대표로서, 주일 대표부 대사로 대일협상을 하는 동안 어업 및 평화선에 관한 문제는 전적으로 지철근 대표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였다.”

한·일 어업분쟁은 다른 국제회의에서도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지 선생은 1952년 10월 마닐라의 제 4차 ‘인도·태평양 수산이사회’와 도쿄의 6차, 1957년 인도네시아 반둥의 7차 회의, 1955년 로마 ‘해양생물 자원보존에 관한 국제기술회의’까지 한국대표를 도맡아 일본의 주장을 꺾고 우리 입장을 지켜내었습니다. 특히 반둥회의 때는 혼자 참석하였는데 주최국이 우리와는 미수교인 사회주의국가라 북한만 인정, 한국 대표의 참석을 방해하면서 회의장에 우리 국기를 게양하지 않는 등 무진 애를 먹였습니다. 그분은 이에 굴하지 않고 회의 집행부에 강력히 항의하여 FAO ‘Flag Book’에 있는 태극기대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 게양하게 하였는데 그 바람에 회의가 2시간 지연되었습니다. 이후 이 일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크게 칭찬받았고 이후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책 145~163쪽 참조) 그분의 대단한 용기와 실력이 혼자서 나라의 위신을 높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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