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한 평생 바다에 심은 사랑, 수산에 바친 후회 없는 외길 인생

지철근 선생은 한 평생 바다에 사랑을 심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되돌아보면 나의 삶은 한 마디로 수산과 함께 한 ‘수산인생’이었다. 우리나라 수산부흥을 위해 내 인생의 황금기를 바쳤고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도 ‘수산 외길’을 걸어왔다.” (앞의 책 13쪽) 그분은 섬마을의 수산 가정에서 누님 네 분과 형님 한 분을 둔 막내로 태어나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났습니다. 1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어머니는 남에게 지지 말고 바르게 살라고 가르쳤고 형님이 수산업과 무역업을 경영하여 부유한 형편이었습니다. 고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1929년 4월 광주고보(현 광주일고)에 입학하였으나 그해 2학기에 광주 학생사건에 가담하였다가 퇴학을 당하고 형님의 주선으로 경쟁률 27대1인 서울 보성중학교 보결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1934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6대1의 경쟁을 통과,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홋카이도대학 수산학부에 진학하였습니다. (같은 책 15~23쪽)

홋카이도대학 시절에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아리랑을 목청껏 불러서 일찍부터 배짱 있는 학생으로 알려졌고 운동선수로 날려서 동기생과 선후배 사이에 인기가 있었습니다. 1976년 9월 홋카이도대학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참석했을 때 동창회 리셉션 장에서 4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수산학부 동문들이 지 선생을 대표로 지명해서 “홋카이도 대학이 미국 대학과는 유대를 맺으면서 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의 대학과는 전혀 유대가 없는가?” 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고 그 내용이 동창회지에 실릴 정도였습니다. 그 후 홋카이도대학은 부산수대와 자매결연을 해서 매년 시험선이 부산항에 기항하면 그분이 선상 리셉션에서 후배들을 격려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책 23~34쪽)

지 선생은 1960년 4월 공직에서 물러나 잠시 쉬다가 덴마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해양조사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정문기 선생과 동행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구면인 FAO 수산부장 핀(Fin) 박사를 만나 선진 각국의 어업조약 연구를 위촉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귀국 후 사단법인 ‘한국수산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정식으로 FAO의 연구 의뢰를 받고 1961년 1월부터 7개월에 걸쳐 영국,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캐나다 등을 순회하면서 세계 어업조약과 자원보호 연구를 수행, 당시 UN의 신해양법 제정에 기초가 된 연구보고서 논문을 집필하였습니다. 이후 그분은 수산중앙회 고문 자격으로 그해 10월에 열린 6차 한·일 회담에 대표로 참석하였으나 혁명정부와 뜻이 맞지 않아서 1962년 12월에 그만두었습니다. 1965년 한·일 어업협정이 체결되어 어업공동위원회가 설치되자 한국 측 위원장을 맡아 1966년 2월부터 7년간 원만하게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같은 책 233~59쪽)

지 선생은 1970년 7월 농어촌개발공사(현 농수산물유통공사)의 차균희 총재의 요청으로 자회사인 ‘한국양식가공주식회사’의 사장을 맡아 김 품질개선 및 생산증대 시범사업, 서해안의 백합양식, 계화도의 보리새우 양식사업을 추진하다가 1972년 1월 임기 만료로 그만두었습니다. 그분은 곧바로 개인기업인 ‘북양수산주식회사’를 설립, 일본 5대 원양어업회사의 하나인 ‘호코(寶幸)수산’과 합작으로 남태평양 마이크로네시아 어장에 진출하였습니다. 이후 이 회사는 남태평양 이외에 라스팔마스, 모로코, 나이지리아, 아이보리코스트, 수리남 등지의 어장과 미국 연안에서 조업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같은 책 259~88쪽)

지 선생은 1984년 부산수대에서 명예 수산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0년 동탑산업훈장을 수상, 1996년에는 ‘월해(그분의 아호)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분은 국제 어업 분야의 고전이 된 ‘평화선’과 ‘한·일 어업분쟁사’ 외에도 ‘지철근 박사 논설집(한국수산신보사 발간, 89)’과 회고록 등 여러 권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기고문을 남겼고 고향인 나로도의 초등학교와 봉래 종합고등학교에 학교 부지를 기증한 뒤 지원을 계속하였으며 ‘월해 재단’을 설립, 수산부문의 연구비와 장학금을 지급하는 한편 1987년부터 ‘월해 수산상’을 제정, 수산부문의 공로자를 찾아 현창하였습니다. 그분은 2007년 94세로 별세할 때까지 후회 없는 수산외길을 지켰습니다. 그분의 회고를 다시 인용합니다. “수산의 길을 천직으로 여겼던 나는 때로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한길만을 고집하여 손해를 자초한 적이 많다. 그러나 이 때문에 남이 못한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쁘고 보람 있게 생각한다. 어찌 보면 수산계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이는 나의 행운이기도 하다.” (앞의 책 ‘바다, 그 영원한 보고’ 214쪽)
※ 다음은 ‘허문회’ 편이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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