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일벼 육종으로 겨레의 숙원인 쌀 자급에 결정적으로 공헌

- ‘통일벼 아버지’ 명명…해외에서는 ‘세계 벼육종학 스승’
- 1971년 전국 550개소서 재배 ha당 평균 5톤 수확
- 면적·수량 늘어…1977년 4170만석 수확 쌀 자급 달성

허문회(許文會) 선생은 국내에서는 통일벼의 아버지로 불리고 해외에서는 세계 벼 육종학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분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일생을 통하여 잊을 수 없는 스승 딱 한 분만 꼽으라면 주저 없이 허 선생을 꼽을 것입니다. 제가 이 연재를 하면서 생존해 계시는 분 중에서 그분을 첫 번째 인물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돌아가신 분 중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 의견을 듣고 저의 선후배 동료 여러분과 상의해서 열일곱 분을 선정하여 소개해 드렸습니다마는 이제부터는 제가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열다섯 분의 농정 스승들을 한 분당 2~3회씩 소개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허 선생이 통일벼를 육성한 계기는 1960년대에 세계적으로 전개된 녹색혁명으로서 노벨평화상 수상자 볼로그(Norman E. Borlaug) 박사가 주도한 멕시코의 밀 종자혁명이 시발점이었고 동남아시아 벼 종자혁명의 주역은 ‘반왜성(半倭性, Semi-Dwarf)유전자’를 가진 ‘단간(短稈, 벼의 줄기가 짧고 키가 작은)-수중(穗重, 이삭이 알차서 무거운)형’ 종자였습니다. 1960년 필리핀 농대 구내에 창설된 국제미작연구소(IRRI)는 1962년부터 동남아 우수품종의 교배육종을 시작, 1965년에 인도네시아 품종 ‘페타(Peta)’와 중국의 반왜성 돌연변이종으로 대만에 도입된 ‘DGWG’를 교배한 ‘IR-8’을 1966년에 최초의 다수확 품종으로 발표하였습니다. ‘TN-1’은 대만품종 ‘차이위엔쫑(菜園種)’에 ‘DGWG’를 교배하여 1956년에 대만에서 육성된 반왜성 단간 품종이었습니다.

허 선생이 2년간의 공동연구를 위해 1964년 7월 말 IRRI에 도착했을 때 IR-8이 약 200계통 심어져 출수 직후 닥친 태풍에도 잘 쓰러지지 않는 품종으로 증명된 상태였습니다. 그분은 1959~1960년 미국 텍사스 농공대(Texas A&M) 연수 시절에 사귄 IRRI 육종부장 비첼(Henry Beachell) 박사와 함께 1965년 필리핀, 대만, 한국, 일본 등지의 시험장을 순회하면서 DGWG와 TN-1 등 육종 모본과 육종체제에 관해 토론한 결과 한국의 벼 다수확을 위해 ‘단간-인디카’ 품종을 가지고 ‘내냉성(耐冷性)-자포니카’에 내도복(耐倒伏)성과 도열병 저항성을 첨가하는 쪽으로 육종 방향을 잡았습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교배종은 불임이 되어 종자증식이 불가능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허 선생은 엄청난 수의 교배조합을 하던 중 제 3의 품종을 교잡하면 불임이 극복되는 현상을 발견, IR-8, TN-1과 함께 일본 카미카와(上川) 시험장 시마자키(島崎佳郞) 장장이 육성한 내냉성, 내병성 최신 품종 ‘유카라’를 3원 교잡의 모본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분은 1966년 유카라와 TN-1의 교배종의 극소량의 꽃가루를 IR-8에 교배하여 얻은 20여개의 3원 잡종을 파종, 그해 7월 마침내 불임을 극복한 ‘단간-수중형’ 채종에 성공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겨레의 숙원이었던 쌀 자급을 가능케 해 준 기적의 볍씨로 나중에 ‘통일벼’로 명명된 ‘IR-667’이었던 것입니다.

허 선생은 1966년 7월 말 귀국 후 1969년까지 여름에는 우리나라에서, 겨울에는 열대지방인 IRRI에서 세대 진전과 선발을 하는 ‘왕복육종(Shuttle Breeding)’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 IR-667 조합의 6계통을 특히 우수한 것으로 선정하였습니다. 공동연구를 수행한 비첼 박사는 1968년 5월에 농촌진흥청장으로 부임한 김인환(金 寅煥) 박사를 IRRI에 초청하여 그 동안의 연구 경과와 실상을 알려주었고 김 청장은 귀국 즉시 허 선생을 직접 찾아와 동참을 요청, 그때부터 서울대 농대와 농촌진흥청의 공동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김 청장은 1970년 여름에 실시한 생산력 검증시험성적을 1971년 2월 초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이 겨레의 염원인 ‘통일벼’로 명명하여 그해 전국 550개소, 2750ha에 5ha씩의 농가 집단포장에서 재배되어 ha당 평균 5톤의 수확을 올렸습니다. 1972년에는 18만5000ha로 확대되었는데 성숙기의 장기 강우와 저온으로 인한 일부 지역의 저 수확을 매스컴이 ‘통일벼 실패’라고 보도했을 때 박 대통령은 1년 더 밀어보고 재평가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1973년에는 면적은 줄었으나 기상조건이 순조로워 대풍을 이루었고 이후 면적과 수량이 늘어 1974년에 3000만 석, 1977년에 4170만 석으로 드디어 쌀 자급을 달성하였습니다. 허 선생은 그 공로를 연구 관리와 기술 지도를 담당한 농촌진흥청과 시의적절한 결단을 내린 지도자에게 돌리고 볼로그 박사의 말을 빌려 “육종가의 역할은 육종에서 끝난다.”고 겸손해 하였습니다. (허 문회, ‘통일벼 품종개발’, ‘한국농정 50년사’ 별책 ‘농정반세기 증언’, 337~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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