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면 전통차 농업’·‘섬진강 재첩잡이 손틀어업’에서 과거와 현재를 보다
전통차 즐기는 청년 세대 증가
딸기·쑥 블렌딩한 대용차 개발 등
전통 잇기 위한 생태계 구축 집중
재첩잡이 손틀어업 전통 유지 위해
섬진강 생태 관리 최우선
[농수축산신문=박세준 기자]
수원 화성, 불국사, 팔만대장경과 같은 세계유산이 농어업에도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선정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이하 GIAHS)이 그것이다.
수백·수천 년 동안 현지 농어업인들이 대대로 계승한 국내외 농어업유산들은 지금도 지역 농어업인들이 농사와 어업 활동의 중심에 있다. 보존을 중시하는 문화유산과 달리 GIAHS는 지금도 농어업인들의 영농·어 활동에 기여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되며 시대와 기술 발전에 따른 변화도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지기에 가능한 일이다.
경남 하동의 GIAHS를 찾아 현황과 후손들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기 위한 과제에 대해 살펴봤다.
# 1200년 역사의 하동 전통차 농업, 위기 속 세대교체로 가능성 모색
GIAHS는 △식량안보와 생계보장 △농업생물다양성 △지역적이고 전통적인 지식 체계 △문화·가치체계·사회조직 △경관의 특성을 기준으로 선정된다. 현재 전 세계 28개국, 95개가 등재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9개가 등재돼 있고 심사 중인 유산이 3개가 있다.
하동 화개면의 전통차 농업은 2017년 GIAHS에 등재되면서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농업유산이다.
하동 화개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차가 재배된 차 시배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김대렴 공이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을 받고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화개는 1200년을 넘어 지금까지 전통차 농업을 지키며 고급차의 본고장으로 명성을 지키고 있다.
화개면은 지리산의 높은 일교차와 섬진강과 화개천의 안개로 햇빛을 적절하게 가리면서 습도도 높아 차 재배에 최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또 하동 차 농업의 특징은 산지 차밭에서 야생차에 가깝게 재배한다는 점이다. 전남 보성의 차밭이 유럽식 정원처럼 깔끔하게 정리된 모양이라면 하동 차밭은 가파른 산지에 정리되지 않은 거친 모양이다.
야생차밭이기에 기계화가 어려워 한 잎씩 손으로 따며 수확해야 하고 차나무들의 유전형질도 조금씩 달라 200~300도로 달궈진 무쇠솥에 찻잎을 볶는 ‘덖는’ 과정을 거쳐 품질을 균질화하고 보존성을 높인 것도 하동 차의 특징이다. 하동만의 차를 덖는 제다법은 201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하동차의 독특한 생태계와 생산법은 채다가, 마을 품앗이단, 하동야생차문화축제, 하동세계차엑스포 등 다양한 문화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고급차로서 전통뿐 아니라 미래를 보고 하동차의 대를 잇고자 하는 지역 청년도 적지 않다. 특히 코로나 대유행 이후 차를 즐기는 청년 세대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3대째 이어온 차 농사를 잇기 위해 중국 절강대에 유학을 다녀온 하윤 옥선명차 일구다 대표는 “차 시장이 확장되는 것을 보고 차 농업에 뛰어든 것”이라며 “코로나 전에는 차 문화가 부모님 세대의 단골인 50대 이상의 전유물이었다면 지금은 20·30대의 문화도 되면서 방문객의 70%는 20·30대가 됐다”고 전했다. ‘일구다(ILGUDA)’ 브랜드도 하 대표가 부모님의 옥선명차 아래에서 청년들이 쉽게 차에 입문할 수 있도록 만든 브랜드다.
조경환 하동차&바이오진흥원 기업지원실장도 “최근 열린 차문화대전에서 그렇게 많은 청년이 참여해 상품을 완판시킨 건 처음 봤고 진흥원에 차를 공부하고 싶다고 문의하는 청년도 늘고 있어서 매우 고무적”이라며 “차 농가도 세대가 교체되면서 소비 트렌드에 맞춰 마케팅, 판매방식 등을 많이 바꾸면서 차 문화의 흐름을 바꿔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청년 수요층이 하동 전통차에 쉽게 입문할 수 있도록 하동차와 딸기나 쑥 등을 블렌딩한 대용차도 개발되고 있으며 보수적인 부모 세대도 이러한 대용차에 대해선 개방적이다”고 덧붙였다.
지자체에서도 하동차의 전통을 잇기 위해 여러 지원을 하고 있다.
임효원 하동군 농산물유통과장 직무대리는 “하동군의 목표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가치와 경제성을 갖춘 차농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라며 △차밭 생산기반 유지와 친환경 재배 활성화를 위한 유기농 자재, 묘목 구입비 등 지원 △판로확대를 위한 차 박람회 참가비 등 지원 △하동야생차 산업특구 지정으로 각종 규제 특례 적용 △하동차&바이오진흥원을 통한 전통차 품질 개선, 기능성 연구의 사업들을 소개했다.
또 박물관, 체험관, 치유관 등으로 구성된 ‘하동야생차문화센터’가 하동차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 방문객들의 만족도가 높다.
다만 농업계가 공통으로 겪는 노동력 고령화와 신규 유입 부족,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량 감소 등은 하동 전통차 농업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기계화 농업이 어려운 야생차밭 대신 보성처럼 기계화가 용이하게 차밭을 가꾸고 가루녹차(말차)를 생산하는 농가들이 많이 늘면서 하동 전통차의 정체성도 조금 흔들리고 있다.
한 농업인은 “청년이 이곳에 와서 대용차, 꽃차 등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원래 하동차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경우도 봤다”며 “최근 가루녹차가 뜨니 하동군에서도 가루녹차 지원 사업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제는 하동차도 중국의 유명한 차처럼 수백만 원에 팔리기도 하는 고급 브랜드로 인정받은 만큼 전통차를 바탕으로 다양해진 소비자 수요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 전했다.
조 실장도 “하동에서 미국 스타벅스 본사로 수출하는 가루녹차 양만 70~80톤으로 7월이 되면 진흥원이 운영하는 가공공장을 3교대로 가동해도 벅찰 정도”라면서도 “하동 전통차가 있으니 가루녹차와 대용차도 있는 것이며 전통차가 무너지면 하동차도 무너지는 것”이라며 전통차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섬진강 재첩잡이 손틀어업, “강이 사는게 최우선”
섬진강에서 하동의 어업인들이 지금도 하는 재첩잡이 손틀어업도 GIAHS에 등재된 어업유산이다. 2018년 해양수산부의 국가중요어업유산에, 2023년 GIAHS에 등재됐다.
재첩은 1~2급의 깨끗한 물과 적정한 염분농도(3~20%), 모래톱이 많은 기수역에 주로 서식하는 민물조개로 섬진강이다. 재첩잡이 손틀어업은 사람이 직접 강에 들어가 대나무 살을 엮어 만든 ‘거랭이’로 강바닥을 긁으면서 재첩을 잡는 전통어업으로 지금도 하동군과 이웃 광양시의 허가를 받은 어업인들은 어업계를 조직해 4~11월 사이 한정된 시간에 맞춰 재첩잡이를 하고 있다.
하동군 관계자는 “하동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부터 재첩이 나오면서 역사성을 갖췄고 거랭이가 대나무에서 스테인리스로 발전하는 등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기술 발달과정이 반영된 점, 또 현재 주민 생계수단으로 기능하는 점 등으로 GIAHS에 등재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등재 이후 하동군에서는 재첩잡이 손틀어업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염분 조절과 폭우에 재첩이 쓸려가지 않도록 주암댐 등 섬진강 상류에 있는 댐 운용을 신경쓰고 있으며 안전슈트 지원과 같은 어업 활동 지원과 함께 남획 방지를 위한 채취 허가권을 발급해 관리하고 있다.
어업인들은 재첩잡이의 높은 수익에 만족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섬진강 상류의 댐으로 말라가는 하류를 보면서 걱정을 숨기지 못했다. 2대째 재첩잡이 어업에 종사하는 조영주 신비어촌계장도 강을 살리는게 섬진강 재첩잡이 손틀어업의 전통을 잇는 첫 번째 조건이라 강조했다.
실제로 하동의 재첩생산량은 2019년 610톤에서 2021년 홍수여파로 178톤까지 줄어든 후 2022년 440톤, 지난해 260톤으로 과거 생산량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조 계장은 “어릴 때만해도 섬진강에 큰 배도 다녀갔지만 지금은 섬진강 물이 하동으로 내려오기까지 주암댐, 섬진강댐 등 여러 댐과 치수장을 거치면서 강물이 배는 물론, 바다 밀물도 못밀어낼 정도로 줄었다”며 “강은 어머니와 같아서 자식인 인간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면 재첩 생산량도 금세 회복할 것”이라 전했다.
그는 또 “이웃 광양보다도 손틀어업의 허가권이 묶여 있어서 청년들이 귀어해도 허가권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며 허가권의 유연한 접근을 지자체에 요청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