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의 시각으로 작은 민원도 소중하게…
[농수축산신문=이문예 기자]
같은 원제를 사용한다고 해도 어떤 제형으로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작물보호제(농약)의 품질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농작업 형태를 반영해 약제 용출량과 제품의 크기, 물질의 비중·경도 등 물리성까지 세심하게 연구한 후에야 하나의 온전한 제품이 탄생한다. 제품이 출시됐다고 끝이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도 설계한대로 제대로 약효가 발휘되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끊임없이 보완·개선해야 한다.
이렇게 고품질의 작물보호제를 빚어내기 위해 제제연구·품질관리 분야에서 불철주야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박세환 경농 R&D본부 중앙연구소 제제팀 책임연구원 △이주남 성보화학 품질관리팀 차장 △강정모 한국삼공 품질관리팀 담당 △변창한 동방아그로 기술연구소 이화학팀장 △정훈성 팜한농 작물보호연구소 제형연구팀 책임 등 5인의 숨은 공신들을 만났다.
# 제제연구·품질관리 거쳐야 빛나는 작물보호제
“제제연구 분야는 각 기업의 민감한 기술을 다루고 있어 타 기업이나 다른 부서로의 이동이 거의 없어요. 대부분 한번 발을 들이면 20~30년 동안 한우물만 파죠.”
제제연구 업무를 하고 있는 변창한 동방아그로 팀장은 23년, 정훈성 팜한농 책임은 18년, 박세환 경농 책임연구원은 13년의 긴 경력을 자랑한다. 어마어마한 경력에 저절로 입이 벌어지지만 이 분야에서는 30년 이상 경력자도 적지 않단다.
정훈성 책임은 “작물보호제를 무기에 빗대자면, 여러 조합을 통해 다양한 성능의 무기를 개발하는 일이 바로 제제”라며 자신의 업무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품질관리 분야도 작물보호제 연구·개발 전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해서 부서 이동이 드문 편이다. 업계 경력 24년의 이주남 성보화학 차장도 8년째 품질관리 업무를 맡고 있고, 강정모 한국삼공 담당도 입사 후 6년째 줄곧 같은 분야에서 선배들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주남 차장은 “민원을 최소화하고 안전한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설비, 제조공정, 부원료 등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표본검사를 통해 문제점을 잡아내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제연구와 품질관리 분야는 특히 제품 출시 과정에서 서로의 긴밀한 협업을 요한다. 초도생산을 통해 품질을 평가하고, 첫 등록 제품의 경우 제제연구 부서에서 전달한 샘플과 상세정보를 품질관리 부서가 사전 검토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 비로소 긴 시간을 거쳐 개발된 작물보호제가 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 기계화·생력화 요구 증가…까다로워진 제형 연구
과거 작물보호제는 비교적 단순한 제형들로 생산돼 왔다. 하지만 최근 드론이나 무인보트, 이앙동시처리기 등 농업기계화와 노동력 부족에 따른 생력화 요구가 늘어나면서 작물보호제 제형도 보다 다양해졌다.
박세환 책임연구원은 “최근 환경오염과 비산 등의 문제로 유제나 수화제 개발이 급격히 줄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를 보완한 액상·입상수화제, 노동력 절감 효과가 있는 직접처리정제와 육묘상처리제 등 생력형 제형 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제제 연구·개발 측면에서 더 까다롭고 어려운 요건들이 늘어난 셈이다.
정훈성 책임은 “예컨대 벼 농사만 해도 종자소독기, 파종기, 이앙 전 드론, 이앙동시처리기 등 각 단계마다 기계화가 진행되고 있어 갈수록 고려해야 할 항목들이 많아지고 제형 개발이 까다로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개발이 어려운 제형을 묻는 질문에는 세 명의 제제연구 담당자 모두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박세환 책임연구원은 액상수화제와 유탁제를 혼합한 제형인 ‘유현탁제’를 꼽았다. 액상·고상 원제 각각의 특성을 고려해 처방하고 물리성 검사·검토 항목에 적합한 약제를 선발하기 매우 까다로워서다. 변창한 팀장은 온·습도, 기기 등 외부 변화에도 물리성 변화가 없도록 해야 하는 직접살포정제, 정훈성 책임은 설계단계에서 양산 품질을 예측하기 어려운 대립제 등을 꼽았다.
# 현장 돌발상황, 발전의 계기로
이렇게 어렵게 제형을 개발해도 현장에선 종종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어떤 돌발상황이 5인의 전문가들마저 당황하게 만들었을까.
변창한 팀장은 2010년 신규대립제를 개발·출시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약제가 한 쪽으로 다 몰려 큰일이 났다’는 지점의 연락에 현장 농가를 둘러봤더니 논 한쪽 구석에 대립제를 물에 뜰 수 있도록 돕는 부재가 둥둥 떠다니더라”며 “약제 개발 단계에서 부재가 물에 녹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농가는 이를 모르니 오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약효도 잘 발휘되고 약해도 전혀 없어 문제는 없었지만 농가에 더 상세한 제품 정보를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정훈성 책임은 원제의 효과가 좋아 오히려 문제가 생겼던 경험을 풀어놓았다. 정 책임은 “2020년도에 수산화구리(쿠퍼하이드록사이드) 등을 주성분으로 하는 벼 종자소독제를 출시했는데 침지 처리 후 종자가 충분히 건조되지 않아 파종에 문제가 생겼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원인을 찾아보니 수산화구리가 볍씨에 우점하는 병원성 세균을 너무 잘 방제해 오히려 부생균이 증식해 발생한 일이었다”며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생균까지 효과적으로 방제 가능한 부자재를 추가해 문제를 해결했던 경험이 있다”고 웃어보였다.
박세환 책임연구원은 수도용 중기제초제를 출시하면서 설계시와 실제의 살포 방법 차이로 고민했던 일을 꼽았다. 입제의 경우 손살포를 많이 해 손살포나 소형기기의 사용을 염두에 두고 제품을 개발했지만 실제 농가들은 비료 살포기 등을 사용하며 분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박 책임연구원은 “다행히 비료 살포기에도 사용 가능한 경도로 개발돼 우려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실험실보다 현장의 소리에 먼저 귀 기울여 약제를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 작은 민원도 소중히
품질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강정모 담당과 이주남 차장은 민원 업무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언급했다.
강정모 담당은 사뭇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품질관리 분야는 민원 업무가 주이기 때문에 에피소드가 없는게 가장 좋다”고 말해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이슈가 없는 게 가장 좋지만 또 민원들을 통해 점도 등 기존 약제들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찾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주남 차장은 “고독성·보통독성의 액상제형 농약은 안전마개를 사용하도록 돼 있는데 간혹 누액 건으로 민원이 들어오면 일반마개보다 원인 파악이 어렵다”며 “최근 우연히 안전마개를 분리해 확인하는 방법을 찾아내 해결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약제의 용출량과 분해율 등을 조정해 약해가 나지 않게 하고 투입 비용을 낮춰 비용을 절감한 일, 약효 개선을 통해 파종동시제품 등 생력형 제품으로 개발한 일 등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다섯 명의 얼굴에 미소와 함께 뿌듯함이 묻어났다.
# 전문성 강화 위한 기업 노력도 꾸준
이러한 다양한 경험들은 계속 누적돼 각자의 특별한 지식과 노하우로 굳어가고 있다. 기업들도 작물보호제 개발·생산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제제연구·품질관리 분야 담당자들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다각도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주남 차장은 “성보화학은 연 1회 2박3일 전직원 워크숍을 열고 직급·직책에 관계없이 생각·의견 차를 좁혀나가며 소통할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강정모 담당도 “한국삼공도 직급을 없애고 연 1회 직원들의 익명 제안에 사장님이 직접 답변하며 전직원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며 “품질관리 직원들도 매년 3~4회씩 타 부서나 지역 영업지점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정보도 얻고 애로사항도 청취하며 소통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방아그로는 직원들의 창의성을 북돋아 자유로운 생각 속에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팜한농과 경농은 업계에 직원의 자기효능감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변창한 팀장은 “제제 업무의 경우 규제나 형식에 얽매이면 업무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사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훈성 책임은 “팜한농은 업계의 1위 회사인 만큼 국내 시장을 선도해 나간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며 “신규 원제 개발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개개 직원들 모두가 실패에 굴하지 않고 업계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것들을 부단히 찾아나선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박세환 책임연구원도 “경농은 70년의 역사 깊은 기업인 만큼 선배들이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가 많다”며 “회사도 직원들이 이러한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업계에 의미있는 성과들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꾸준히 독려하고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