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진주 이론과 삼각형의 정리, 소박한 삶의 지혜와 가르침
- 농민들 마음에 파고들어 진주만들겠다는 마음 중요
- 과학적 영농지식 습득...''''농촌살리는 길'''' 선견지명
- 육종학 태두답게 ''''종자=우주'''' 종자통해 영생 강조
“안광(眼光)이 엽배(葉背)에 철(徹)하도록 관찰하라.” 우장춘 박사가 후학이나 제자들에게 늘 강조한 가르침입니다. 즉 농생명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 관찰력이 농작물의 잎을 뚫고 들어가 잎 뒤쪽까지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항상 “철저한 관찰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또한 “그 과학적 접근방법의 바탕은 결국 사람의 정성”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셋째 따님의 회고에 의하면 그분은 일본 농사시험장에 근무할 때부터 밤중에 큰 비가 오거나 심한 바람이 불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시험장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연구를 위한 정성이 그때부터 이미 몸에 배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는 가장 화려한 보석이지만 인공으로는 가짜밖에 만들 수 없다. 진주는 인공 양식이 가능하므로 누구나 노력하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학문적 성과는 남에게 다이아몬드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알 한 알의 진주를 만들어 모은 것이 덩어리가 되어 찬란한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 박사의 유명한 ‘진주 이론’입니다. 그분은 “젊은 사람이 노력은 않고 남이 거둔 성과를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부러워 갖고 싶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능력껏 노력하여 자신의 진주를 하나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농민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정부에서 무엇인가 해 주기만 바라는 농민은 잘 살 수 없다. 농민을 지도할 때에도 천편일률적인 방식을 지양하고 농민들의 마음에 파고들어 하나하나의 진주를 만들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농촌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우 박사는 당시 우리 국민의 8할이 농사에 종사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국민의 2할 정도가 농사짓고 8할은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거나 기술자가 되어 무기도 만들고 수출품도 만들어야 나라가 부강해 질것인데 아직도 ‘농자 천하지 대본’이니 무어니 하며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이 있을 뿐 아니라 이농자(離農者)가 는다고 마치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드는 사람들이 많아 큰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정보도 안 되는 경작면적에서 무슨 수로 고액의 소득을 올릴 수 있겠는가? 농민의 수를 줄이고 경작면적을 늘리는 동시에 영농을 기계화, 과학화해야 한다. 단순 노동력에만 의존하고 있는 농민들을 하루속히 교육하여 과학적 영농지식을 습득케 하는 것이 시급히 우리 농촌을 살리는 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대를 앞선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 박사의 ‘삼각형의 정리’는 제가 농림부 근무 초년에 존경하는 상관이자 스승이던 정용복 선생이 몇 차례 말씀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 박사는 “누구나 20대는 예리하게 각이 져 있는 삼각형과 같다.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패기가 있어야 한다. 두리 뭉실 원만하기만 해서는 20대가 아니다. 그러나 패기만 있고 올바른 판단이 없으면 그 패기는 만용이 되어 남을 상하게 하고 자기도 상하게 하기 쉽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삼각형 안에 차츰 원숙한 인생관과 사물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이 들어가면서 30대는 모서리가 잘려 6각형, 40대는 12각형, 50대는 24각형, 60대는 48각형으로 거의 원에 가까워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30대에 완전한 원형이 된 사람은 석가모니와 공자,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면서 “만약 인생 수련을 게을리 하면 원이 제대로 차지 못해서 우글쭈글 아무짝에도 못쓰게 되고 60대가 되어서도 아직 삼각형인 채로 있는 사람은 비정상이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분 스스로 일생 경험을 통해 깊이 깨달은 진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 박사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생 ‘가는 자를 쫓아 붙잡지 아니하고 오는 자를 막지 아니한다’를 신조로 하였고 남의 험담을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술을 전혀 못하는 체질이었지만 집에서 매실주, 머루주, 포도주 등을 직접 담아서 이웃에 나누어주기를 즐겨했고 아래 위를 가리지 않고 여럿이 함께 술자리에 어울려서 즐겁게 노는 것을 젊을 때부터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한동안 국민 오락의 하나로 불린 ‘고·스톱’ 화투 놀이가 실은 우 박사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우 박사는 육종학의 태두답게 ‘종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이며 무엇이나 이 ‘종자’ 즉 ‘씨’를 통해 ‘영생’해 가는 방식이 우주의 살아 움직이는 대원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우주와 인간의 윤회를 인정하여 자신의 인생을 정성을 다해 진지하게 살았고 죽음도 하등의 저항이나 거부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 다음은 ‘강정택, 농지개혁의 주역, 자유 대한을 살리다’가 연재됩니다.
- 기자명 농수축산신문
- 입력 2010.02.12 10:00
- 수정 2015.06.26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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