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흥농종묘’를 창업, 우리 종자·종묘산업의 선두주자로 키우다
- 1936년 ‘서선농림’ 창업 ‘씨앗외길 60년’ 출발
- 우리나라 최초로 배추 종자 5종 우편물 수출도
- 1940년 제주서 종묘사상 처음 ‘무 채종포’ 개설
이춘섭(李春涉) 회장은 ‘한 평생 씨앗을 키우는 농부의 마음으로 정도와 순리로 살면서 흥농부국(興農富國)의 일념으로 한국 종묘산업의 금자탑을 쌓은’ 분입니다. 1999년 3월 26일 그분의 1주기를 맞아 충북 청원군 강외면 소재 ‘흥농종묘’ 육종연구소의 동산에 안장된 그분의 묘소 앞에 평소 그분을 존경하고 따르던 각계 인사와 흥농종묘 임직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송덕비의 첫 구절입니다. 이 회장은 1911년 6월 26일 황해도 황주군 대월동에서 부지런한 부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근면과 성실의 가정 분위기를 몸으로 익히며 자라났습니다. 7살 때 서당에 다니다가 9살 때 시오리 떨어진 황주 읍내 양성학교 유치원을 마치고 이웃 봉산군에 있는 명농학원과 황주농업보습학교를 거쳐 1927년에 서북지방의 유일한 명문 농업학교로 입시 경쟁률이 7대1인 ‘사리원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사리원은 봉산군 군청 소재지로 서울과 평양, 신의주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요 재령평야를 끼고 있는 농축산물의 집산지였습니다. 그분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농사일을 많이 거들면서 사리원 농림시절 강의보다는 농장 실습에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고 보람 있게 느꼈고 졸업 후 취직은 염두에 두지 않고 과수원 같은 자영업을 꿈꾸는 좀 남다른 학생이었습니다. (이춘섭 저 ‘씨앗외길 60년’, 흥농종묘 출판부 간행, 1996, 3~14쪽 참조)
이 회장은 학교를 졸업한 1932년 5월 우선 ‘곡산연초경작조합’ 지도기수로 취직을 해서 4년을 근무, 월급을 모은 돈과 퇴직금으로 재학 중에 아버지에게 빌렸던 사업비를 갚고 과수원을 사들여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황주사과를 생산하면서 황주군청 잠업계에서 농업기술 지도 일을 보았습니다. 1936년에 세 사람이 합작해서 ‘서선(西鮮)농림합자회사’를 설립, 사업에 첫발을 내디뎌 첫 사업으로 사과묘목 수입을 했는데 큰 실패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사리원농림 시절 시라키(白木) 선생이 “조선은 기후가 온화하고 가을 날씨가 특히 청명 건조하니 채종사업이 유망하다”라고 일러준 것을 기억해내고 채소 종자의 수입 판매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몇 차례 실패를 겪고 나서 궁중대근 무 종자 수입으로 큰 수입을 올리고 제법 위상을 갖춘 ‘종묘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분은 1936년의 ‘서선농림’ 창업을 ‘씨앗외길 60년’의 출발로 회고하였습니다. (앞의 책 22~35쪽)
이 회장은 남다른 열정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1939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배추 종자를 5종 우편물로 수출하였고 1940년에 제주도에 국내 종묘사상 처음으로 무 채종포를 개설하였습니다. 1942년에 점포를 평양으로 옮겨 본격적인 종묘사업을 하면서 1944년에 ‘조선종묘협회’ 설립을 주도, 갑종 회원 자격을 획득하였고 전남 진도에 70정보의 배추와 무 채종포를 개설하였습니다. 만주에서 종자를 수입했을 때 샘플 종자를 물에 적신 탈지면에 싸서 허리춤에 차고 이틀이 지난 다음 발아 상태를 확인한 간이시험방법을 창안한 것은 그분의 기지를 잘 보여준 사례입니다. 해방 후 평양에서 종자생산협회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여 남북을 오가면서 사업을 하였으나 도저히 이북에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 목숨을 걸고 6·25 직전인 1950년 4월에 월남하였습니다. 그분은 그해 5월에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에서 종자를 수입하였으나 금방 전쟁이 나서 부산으로 피난, 1951년 ‘대한종묘사’ 간판을 걸고 개업을 하였다가 같은 이름의 상점이 이미 있어서 1952년 2월에 ‘흥농종묘사’로 이름을 바꾸어 창업을 하였습니다. (같은 책 36~74쪽)
이 회장은 창업 첫해부터 당시의 종묘상 중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상보(商報)’ 제작을 모험적으로 시작하여 경영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하였고 경남 남해에 위탁 채종농장을 개설하였다가 우여곡절 끝에 1954년에 이를 전남 해남으로 옮겼습니다. ‘흥농종묘’는 1958년에 주식회사로 면모를 일신하면서 본사를 서울로 이전, 부산과 대구에 지점을 개설하였고 채소 종자 이외에 과수와 관상수 묘목도 수입하였는데 그 중에서 밀감 묘목을 수입하여 제주도에 집중 공급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분은 무, 배추, 잔디 씨와 전나무, 탱자, 낙엽송 등의 종자, 자운영 등의 녹비작물을 일본, 미국, 서독, 대만 등지에 수출하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책 75~97쪽)
그분은 ‘근면, 성실, 창의’의 노력으로 ‘흥농’을 한국 종자·종묘 산업의 선두주자로 키웠고 1997년에 채소종자만으로 ‘1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하는 기적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분이 별세하기 1년 전이었습니다.
- 기자명 농수축산신문
- 입력 2010.07.12 10:00
- 수정 2015.06.2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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