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우리 수산의 생명선인 평화선의 창안·획선·선포·수호를 주도
‘평화선’으로 알려진 ‘어업자원 관할수역’ 또는 ‘어업보호수역’은 1952년 1월 18일 대륙붕의 광물자원 보호와 이용·개발까지 범위를 확대하고 국제법상의 안보 개념을 도입한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으로 국내외에 선포되었습니다. 이 선은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알려져 일본에서는 한·일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리-라인’으로 불리었으나 당시 한·일 양국과 미국의 수산·해양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작업을 주도한 지철근 선생의 이름을 따서 ‘지-라인’으로 통했다고 합니다. ‘평화선’이란 이름은 이 대통령이 갑자기 이 선을 선포하자 일본을 위시한 관계국들이 반발 움직임을 보여서 2월 8일자로 우리 정부가 “한국이 인접 해양에 관한 주권선언을 한 목적은 한·일 양국 간의 평화를 유지하려는데 있다.”라고 해명한 데서 생긴 이름이었습니다. (유풍출판사 발간 ‘바다, 그 영원한 보고: 바다에 도전한 사람들’, 93, 지 철근 편, 176쪽, 앞의 책 ‘수산부국의 야망’ 49쪽) 이 선은 그 후 1982년 ‘UN 해양법 협약’에 의해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인정되어 오늘날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일이었고 지 선생이 바로 그 창안자였던 것입니다.
지 선생이 이 선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미 군정청에 정문기 선생과 함께 근무할 때부터였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은 식량 확보 차원에서 어선 건조와 어장 확대에 혈안이 되었는데 일본의 해양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그어 놓은 ‘맥아더 라인’으로 어장이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 수역을 침범하기 일쑤였습니다. 실제로 해방 직후 우리 어장에 출어한 일본어선 수가 트롤선 7척(300톤급), 저인망어선 50척에 불과하던 것이 1949년에는 트롤선 58척, 저인망어선 973척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우리 수역에서 불법조업을 일삼으며 수산자원을 고갈시켜 그 대책이 시급했던 것입니다. 1950년 6월 17일 지 선생은 어선 구입 차 일본 규슈지방에 출장을 갔는데 6·25전쟁이 발발, 교통이 끊겨 귀국을 못하고 한국대표부에서 군수물자 수송 업무에 종사하던 중 8월초부터 12월까지 제주도 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분은 이때 막역한 친구로 사귄 SCAP의 헤링턴, 셔벤 씨와 라보(C. W. Leaveu) 어선담당관을 통해 어업자원 관할수역의 근거자료로 미국의 ‘트루만 선언’과 1950년까지 해양주권선언을 한 17개국 중 중남미 9개국의 선언 원문과 관련자료, 일본이 독점하여 우리에게 주지 않았던 서해안의 어장도, 당시 진행 중이던 미·일·캐나다 어업협정에 관한 정보 등 필수자료를 수집하였고 전문적인 관련 국제법을 공부, 대한국제법학회 논문집에 기고한 논문이 제 1차 국제해양법회의에 참고자료로 제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앞의 책 ‘수산부국의 야망’ 47~51, 112~4쪽 참조)
지 선생은 귀국 즉시 이 수역의 획선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을 틈타 일본어선이 제주도 연안과 흑산도 근해에 몰려와 불야성을 이루면서 조업을 일삼아 하루도 미룰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일본이 1928년에 어업자원 보호를 이유로 조선총독부령으로 제정한 어로금지구역을 기준선으로 삼았습니다. 이를 그대로 적용하면 일본도 반박할 구실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선에 독도가 포함되고 ‘어업보호수역’으로 명칭이 바뀌어 1951년 8월 국무회의에서 의결, 9월 18일 대통령에게 제출되었으며 지 선생은 1952년 4월이 되면 맥아더 라인의 효력이 정지될 것을 알고 그 전에 서둘러 이를 선포하도록 촉구하였습니다. 또한 평화선의 선포는 말 그대로 선언에 그치는 것이어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관련법규를 제정하는 일이 시급함을 간파하고 ‘어업자원보호법’의 제정을 서둘러 1953년 12월 1일에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같은 책 51, 113, 120~8쪽 참조)
지 선생은 그 후에도 국제법상의 시비가 그치지 않아서 각 언론에 글을 발표하고 방송이나 대학교에서 강연을 하는 등 평화선의 정당성을 이해시키는데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이 평화선을 지키기 위해 우리 해양경비대가 1964년까지 나포한 일본어선이 313척이었고 억류 선원은 4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쓴 ‘일·한 어업대책운동사’에 의하면 나포어선 중 126척만 송환되고 185척은 한국이 압류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분은 압류한 어선을 공매 처분하면서 일부 성능이 우수하고 규모가 큰 20척 가량의 배는 당시 실습선이 없던 수산계 학교나 연구기관에 무상으로 공여, 연구와 실습에 활용되도록 하였습니다. (같은 책 108~10, 122쪽 참조) 이 역시 앞을 내다본 그분의 결단이 수산진흥의 밑거름이 된 또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 기자명 농수축산신문
- 입력 2010.09.06 10:00
- 수정 2015.06.2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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