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종일관 부드러우면서 지엄한 학문과 인생의 참스승

허문회 선생은 1927년 1월 21일 충북 충주 태생으로 1946년 청주사범 심상과 5년 졸업 후 바로 수원농전(현 서울대 농생대의 전신) 농학과에 입학하여 2년을 수료, 1948년 서울대 농대 농학과로 개편되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현지 입대하여 일선 육군 보병 8사단 수색대대에서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1953년 육군상사로 제대 복학하여 1954년에 농학사, 1957년에 농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59년 1월부터 1960년 2월까지 미국 텍사스 농공대에서 연수, 1968년에 서울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54~1957년에는 중앙농업기술원 기술촉탁으로 근무, 석사과정을 마친 뒤 1957~1958년에는 농사원 시험국과 농사시험장 농업촉탁, 1958~1960년에는 농사원 시험국 농업기좌로 재직하였습니다.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 후 1960년 9월 30일 서울대 농대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이후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1992년까지 근무, 정년퇴임한 뒤에는 명예교수로 활동하였습니다.

허 선생은 총 216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하였고 ‘식물육종학 원론(번역, 공저, 1963, 문운당)’, ‘작물유전육종학(공저, 1983, 방통대)’, ‘벼의 유전과 육종(공저, 1986, 서울대)’, ‘육종학범론(공저, 1989, 향문사)’, ‘재배식물육종학(공저, 1990, 방통대)’, ‘자화수분 작물육종론(공저, 1993, 중국연변인민출판사)’ 등 6권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후학으로 25명의 석사와 11명의 박사를 배출, 모두 국내외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중추적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연구는 ‘한국의 벼 재배역사’로서 “일본으로 벼가 전파된 주경로가 한반도”임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그분은 한국작물학회장과 한국육종학회장을 역임하였고 국제적으로는 아시아·오세아니아 육종학회(SABRAO)와 국제 벼 유전학회(IRGC)의 상임이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분은 1977년에 수상한 ‘5·16 민족상’ 상금 전액을 예금해 두었다가 1992년 정년퇴임 시에 통장 그대로 서울대 농생대 교육연구재단에 기증, 참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산업훈장 이외에도 ‘성곡재단 학술상(1987)’, ‘자랑스러운 서울대학인상(1993)’,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농수산학술상(2002)’을 수상하였으며 2009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의 헌정대상자로 추천되었습니다.

허 선생은 항상 웃는 낯이었습니다. 저는 선생의 화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학문과 실험에는 자신과 동료, 제자들에게 한 결 같이 실로 지엄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입학 한 달 후면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졸업한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마주친 제자가 인사를 드리면 “아, 자네 아무개 군이 아닌가?” 하고 정확히 이름을 기억하고 있어서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분은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C 학점 아래로는 학점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육종학 공부는 안 하거나 못할 학생인데 공연히 나쁜 점수를 주어서 그 제자의 앞날에 지장을 줄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었습니다.

저도 ‘대학신문’ 기자에다 농대 연극반장을 하느라고 벼 육종학 공부는 거의 팽개친지라 기말시험 때 백지에다 한시를 한 수 적어내었는데 그분이 그것을 보고 웃으면서 C를 주신 덕분에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농림부에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분을 복도에서 마주쳐서 인사를 드렸더니 “아니, 자네가 여기 웬 일인가?” 하셔서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잠시 한숨을 쉬시기에 제가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더니 “아, 자네 같은 사람이 농림부에 사무관으로 근무한다니 이 나라 농정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한 마디로 제가 가야 할 길을 너무도 확연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제자로서 우리 농정의 앞날에 절대로 그분이 걱정하실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0년이 지나 동기생 몇이 선생과 함께 한 자리에서 제가 “아직도 저 때문에 우리 농정이 걱정되십니까?” 하였더니 “이 사람아, 아직도 그 일을 못 잊고 있는가? 이제는 잊어버려도 될 것일세.” 하셨습니다.

선생이 2000년 스승의 날에 제자들에게 써준 한시 ‘동승 세월주 유감(同乘 歲月舟 有感)-우리 같이 이 나라 농업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인연을 대견하게 생각하며-’을 인용합니다. “세월을 같이 타고 흘러가는 배(合乘歲月流下舟) 영겁 속의 찰나를 완급으로 흘러가며(緩急刹那永劫流) 양안의 풍물을 같이 느끼니(同感風物兩岸景) 송영하는 이 기연 감사하며 노래하오.(送迎奇緣謝歌謳)”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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