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국민 대다수가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지었고, 그래서 백성 또는 국민이라 하면 당연히 농민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나라에 세금을 내고, 병역의무를 이행해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등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을 때에는 의병으로 활약해 나라를 되살리는데 누구보다 앞장을 섰다.
그러한 농민들은 1950년대에 들어가서야 농지개혁에 힘입어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농지를 갖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자식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만들어 줌으로써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고도성장에 필요한 귀중한 인적 자원들을 키워냈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베이비부머’로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농민’도 전문 경영인이 돼야 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도 ‘농업인’으로 바꾸고, 의욕적으로 세계와의 경쟁에 나서게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농업인들이 경쟁에서 탈락하게 됐다. 세계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대형농기계와 자동화된 농업장비들의 활용이 불가피해졌는데, 그 결과 농업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로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농산물관세와 정부보조금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는 특정한 국가들 간에 자유무역체제(FTA)가 성행하게 되면서 우리의 농업인들은 갈수록 어려운 조건에서 버거운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고생한 만큼 그 대가도 주어지는 법이다. 혹독한 경쟁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농업인들의 실력은 어느새 선진국 농업인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성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과 육류, 그리고 채소, 과일들은 품질과 안전성에 있어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우리의 농산물도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으로서 세계의 소비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단계에 이미 와 있는 것이다.
지금 농촌현장에는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젊은 농업경영인들이 사명감을 갖고 의욕적으로 여기저기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첨단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이들 젊은 농업경영인들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온 한국 농업인의 참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세계적으로 농산물을 포함한 식품시장은 자동차, 반도체 등 그 어느 시장보다 크고 부가가치도 높다. 우리의 젊은 농업경영인들이 세계시장을 공략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이다.
농업을 완전히 시장에 맡겨 놓은 나라는 없다. 미국의 쇠고기산업만 해도 미국의 축산업자에게 광대한 공유지를 헐값에 임대해 준 결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젊은 농업경영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첨단기술, 그리고 그들의 실력을 담보로 투자자금을 빌릴 수 있는 농업금융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농업R&D와 농업금융에 국가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한 때이다.
전 농촌진흥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