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도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기초식량작물부장 

[농수축산신문=농수축산신문]

지금 인류는 생태적 균형의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경고가 아닌, 농업 현장을 실시간으로 위협하는 현실이 됐다. 특히 벼처럼 생육 기간이 긴 노지작물은 외부 기상 요인에 온전히 노출되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피하기 어렵다.

최근 몇 년간의 사례만 봐도 상황은 심각하다. 2022년에는 이상 고온으로 벼의 불임과 백수가 광범위하게 발생했고 2023년에는 태풍 ‘카눈’으로 흰잎마름병 피해가 대규모로 확산됐다. 지난해 이삭이 영그는 9월 평균기온은 평년보다 약 5도나 높아지며 쌀 품질이 크게 떨어졌고 벼멸구 피해 면적은 전년 대비 무려 34배 증가했다. 올해는 시간당 100mm 이상의 극한 강우가 반복되면서 수만 ha의 벼가 물에 잠겼다.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는 벼 재배가 어려운 현실이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은 이에 대응해 기후 스트레스에 강한 벼 품종 개발에 주력해 왔다. 그 결과 최근 육성된 ‘미소진품’과 ‘신동진1’은 고온 환경에서도 고품질 쌀 생산이 가능하고 벼멸구 저항성을 지닌 ‘친들’은 멸구 피해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벼에 적용된 과학기술은 단순한 문제 해결을 넘어 식량안보를 지키는 전략 자산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벼 품종 개발에는 오랜 연구 기간과 육종가의 풍부한 경험이 필수적이다. 더욱이 최근 병해충과 자연재해가 동시에 발생, 전통적인 육종 방식만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이제는 품종 개발 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며 그 해답으로 주목받는 것이 바로 ‘디지털육종’이다.

디지털육종은 유전체 분석, 생육 정보 수집, 인공지능 기반 예측, 환경 시뮬레이션 등을 융합한 차세대 육종 기술이다. 나아가 드론, 다중스펙트럼 센서, 열영상 장비 등을 통해 작물의 생육 전 과정을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고 유전체-환경-형질 간의 복잡한 관계를 구축된 데이터로 구조화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더 빠르고 정확한 예측 기반 육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국내외 현장에서도 실현되고 있다. 국제벼연구소(IRRI)는 침수에 강한 유전자를 활용해 동남아에 내침수성 벼 품종을 보급 중이며, 일본 나로(NARO)는 고온 불임을 억제하는 유전자를 활용해 ‘호쿠리쿠(Hokuriku) 193’을 개발했다. 우리나라도 드론을 활용한 생육 정보 수집을 통해 500여 벼 계통의 생육과 수량 데이터를 정량화했으며 유전체 분석을 기반으로 도열병과 흰잎마름병 등 복합저항성 벼 계통을 신속히 선발하는 분자육종기술도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들은 단지 품종 개발의 효율화를 넘어 기후 재해에 대응할 수 있는 내재해성 작물 확보의 기반이 될 것이다. 디지털육종을 통해 진화한 벼 품종들은 고온에서도 불임이 발생하지 않고 다양한 병해충에 저항성을 갖춘 복합내병충성 맞춤형으로, 안전하게 재배될 미래의 우리 들녘을 만들어 갈 것이다. 

결국 디지털육종은 기후변화에 ‘예측 가능하게’ 대응하고 식량안보를 ‘정밀하게’ 지키는 전략 기술이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서 있는 농업 현장에서는 과학기술이 방패이자 나침반이 돼야 한다. 식량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작물을 키우는 것을 넘어 그 근간을 재설계하는 일이다. 디지털육종은 그 변화의 시작이자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할 미래다.

저작권자 © 농수축산신문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