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연구원
어복버스와 함께하는 비대면 섬닥터…만족도 크게 개선
도서지역 의료‧복지서비스 접근성, 도시어촌에 비해서도 큰 격차
제도적 정비‧재원마련위해 정부‧지자체뿐만 아니라 민간 조직의 적극적 참여‧협력 담보돼야
서비스확대 위한 민관협력 필요…정규사업으로 확대해야
[농수축산신문=김동호 기자]
며칠간의 풍랑이 가시고 수평선에 아침 햇살이 막 고개를 내던 지난 15일 새벽, 목포여객선터미널엔 분주한 움직임이 감돌았다. 의료가방, 미용도구들로 양손 가득 짐을 챙긴 이들이 하나둘 모인다. ‘어복버스’ 팀이다. 이·미용 서비스, 이동목욕, 비대면 진료까지, 이들은 오늘 하루 율도 주민들의 건강과 일상을 책임질 ‘찾아가는 생활복지팀’이다.
오전 7시, 여객터미널에서 율도로 향하는 슬로아일랜드호가 항로를 나선다. 바닷바람은 차갑지만 이들이 건너는 길 위엔 묵직한 사명감이 깃들어 있다. 윤슬로 이어진 바닷길을 따라 40여 분을 달려 지주식 김 양식장을 지나면 목포 앞바다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소박하고 따뜻한 섬, 율도가 보인다. 선착장에서 어복버스 서비스가 이뤄질 율도힐링센터까지는 1km 남짓, 짐을 나르고 설치를 마치기까지 모두가 분주하다. 한 켠에 안내판을 세우고 동선을 구성하는 손길엔 오늘 하루를 잘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 섬은 가깝지만 복지는 아직 멀다
율도는 행정구역상 전남 목포시 유달동에 속해 있고 목포 앞바다 4개의 작은 섬들을 거쳐 하루 네 편의 여객선이 오간다. 지도로만 보면 접근성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승선 대기와 이동 시간, 그리고 섬에서는 별다른 교통수단 없이 도보로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은 결코 작지 않다. 무엇보다 이 섬엔 병원도, 이발소도 없다. 210여 명의 주민이 살아가고 있지만 일상생활의 기본이라 할 만한 서비스는 부족하다. 거주민 중 상당수가 고령층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부족함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절박함’으로 다가온다.
2024년 어촌지역 유형별 보건복지 만족도 조사 결과 섬 어촌은 연안·도시 어촌에 비해 월등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의료서비스 접근성은 평균 3.97점, 복지서비스 이용 편의성은 4.61점에 그쳤다. 도시 어촌의 만족도(6.34점)와 비교하면 2~3점 이상의 격차다. 이 수치들은 단순한 지역 차이를 넘어 도서지역에 복지 사각지대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섬에 병원이 없어 힘들다’는 섬 지역 주민들의 말은 그저 불편하다는 말이 아니라 통계로도 드러나는 삶의 질의 격차인 셈이다.
# 파도 위를 건너는 ‘작은 복지’
이날 어복버스가 율도에 머무는 시간은 약 5시간. 의료진은 원격진료 장비를 활용해 주민들의 건강 상태를 점검했고 미용사는 정성스레 고령 어르신들의 머리를 다듬었다. 이동목욕 서비스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큰 위안이 됐다.
이날 어복버스 서비를 제공받은 어르신은 “봄, 가을에는 한달에 두 세번 정도 결항이 되는 것 같다”며 “미용실을 가려면 뭍으로 가야 하기에 집에서 혼자 염색하는데 군데군데 얼룩덜룩하다”고 토로했다. 어르신의 말에는 일상의 어려움에 외로움이 함께 묻어 있었다. 어복버스는 단순히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육지와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고 있었다.
지난해 실시된 어복버스 시범사업에서는 전남 고흥군, 목포시, 여수시, 완도군, 신안군, 진도군 등 6개 시·군 지자체와 민간기관이 협력해 이·미용 272명, 이동목욕 62명 등 총 334명의 섬 주민에게 생활복지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294명을 대상으로 비대면 섬닥터 의료 서비스를 시행했다.
서비스 만족도는 수치로도 뚜렷한 변화를 보였다. 비대면 섬닥터 이용자의 의료 만족도는 평균 2.5점에서 9.4점으로, 생활복지 서비스는 이용 전 2.2점에서 이용 후 9.6점으로 각각 크게 향상됐다. 이는 단기적 체험이 아닌 실질적 삶의 변화로 연결된 결과다. 이 수치는 단순한 찬성의 의미를 넘어, 실제 정책화 필요성에 대한 지역 주민의 강력한 요구로도 읽힌다.
# 정책간 시너지가 필요하다
바다를 건너는 일이 늘 그렇듯 어복버스의 여정도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다. 다행히 율도는 어촌뉴딜300사업을 통해 조성된 ‘율도힐링센터’를 어복버스 서비스 거점으로 활용, 도서지역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섬 지역이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때로는 경로당 마당이나 마을의 자영업체의 협조에 기대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곤 한다. 이 때문에 날씨가 궂은 날이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정 자체에 크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율도의 사례를 보면 정부가 추진하는 어촌재생사업 또는 어촌개발사업을 지역의 생활서비스 공급을 위한 어복버스사업과 연계한다면 서비스를 체계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정착시켜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정부의 정책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면 상이한 정책들이 시너지를 내면서 정책사업의 수혜주민들의 만족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어촌의 복지서비스가 단단히 뿌리내리기 위해선 이처럼 지역 기반의 인프라 연계가 더욱 중요하다. 어복버스는 ‘그냥 지나가는 차’가 아닌, 마을 광장 같은 기능을 하며 주민들과 가까워지고 있다. 앞으로 진료와 이·미용 외에도 장수사진 촬영, 복지지원정책사업 안내 등 다른 서비스로 확장된다면 그 효과는 더 넓게 퍼질 것이다.
# 시범사업의 한계를 넘어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 헌법 34조는 국민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는 점과 국가는 사회보장과 복지 증진에 노력해야 함을 규정한다.
헌법이 규정하는 국민의 권리와 국가의 의무는 섬까지 닿지 못한다. 고령의 섬 지역 주민들의 대다수는 당뇨, 고혈압 등 만성질환이 있으나 의료진이 상주하는 비연륙도서는 드물다. 어복버스와 함께 이뤄지는 ‘비대면 섬닥터’ 사업을 통해 제한적인 수준에서 원격서비스가 이뤄지지만 현행 의료관계법령에 따른 체계에서는 제약이 많다. 아울러 일부 도서지역은 통신망의 품질을 담보하지 못해 비대면 섬닥터마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는 이같은 한계점들에 개선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또한 어복버스를 통한 서비스가 전국의 어촌과 도서지역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정비와 재원 마련을 위해 정부, 지자체, 공공기관 뿐만 아니라 수협, 기업 등 민간 조직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이 담보돼야 한다. 아울러 어촌의 복지서비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어촌공동체가 관련 서비스의 일부 운영 또는 지원할 수 있는 자체적인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
# 바다 위 복지의 다음 항해를 위해
섬은 여전히 고립돼 있고, 주민은 줄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누군가는 태어나고 자라며 병들고 늙어간다. 귀어인을 유치하는 정책도 중요하지만 지금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먼저 존중받아야 한다.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기 전에 남아 있는 이들의 손을 놓지 않아야 한다.
한국섬진흥원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섬 지역의 인구는 약 4.7% 감소했으며 2042년까지 18.1%가 더 줄어들 것이란 전망도 있다. 현재 인구 10명 미만의 ‘소멸 위기’ 유인도는 이미 25곳을 넘었고 머지않아 수십 개의 도서가 무인도서로 전환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해양수산부는 무인도서의 보전 중심 정책에서 사람 중심의 이용·지원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이 있는 섬은 끝까지 지킨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지만 결국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섬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지킬지에 달렸다. 어복버스는 그 해답 중 하나로 바다를 건넌다.
율도에서의 하루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다. 의료와 행정, 공동체와 문화가 함께 실려 도서로 향하는 ‘움직이는 공공성’이다. 원격진료, 복합 복지 공간, 찾아가는 생활 서비스는 섬 어촌의 내일을 위한 작은 기둥이 된다. 바다는 섬을 고립시키지만 또 누군가는 그 바다를 건너 다시 연결의 끈을 이어간다. 섬이 멀다고 복지도 멀어질 순 없다.
바다 위를 달려오는 그 작은 버스에는 섬 주민들의 오늘과 내일이 함께 실려 있다.
